병 주고 약 주고가 아니라, 병을 주었으니 약도 주는 것...
드라마 <허준>이 아니어도 조선시대의 명의인 허준과 그가 집필한 《동의보감》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사실 한의학은 근대화 과정을 거치는 기간 동안, 서양 의술에 비하여 효과가 떨어지는, 마치 사술인 것 마냥 취급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휘황찬란한 옷 보다는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하듯, 한의학은 결국 그 권위를 다시 인정받으며 우리들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어쩌면 그러한 복권의 과정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동의보감》과 같은 역사적 문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허준은 엄청나게 거대한 한의학 전통에서 2천여 가지의 증상, 1400종의 약물, 4천여 가지의 처방, 수백 가지의 양생법과 침구법을 뽑아 냈는데, 그것은 한의학을 종합하기에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가장 적절한 분량이다.” (신동원,『조선사람 허준』, 163쪽)
《동의보감》은 ‘기존의 의학적 전통을 집대성하고 양생술을 바탕으로 하되 그것을 조선의 백성들이 널리 활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선조의 명에 의하여 허준이 집필한 의서이다. 물론 그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허준은 당시 전해지던 유명한 의서들을 종합하는 동시에 자신의 자연철학적인 관점을 고스란히 투과시켜 책을 만들었다. 특히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작성한 허준식의 ‘글쓰기’는, 《동의보감》을 단순한 의학 매뉴얼이 아니라 대중적인 의서로 만들어 주었다.
“가슴과 배는 궁궐과 같고, 사지四肢는 교외에 경계가 있는 것과 같다. 관절은 백관百官의 할 일이 나뉘어진 것과 같다. 신神은 임금이고 혈血은 신하이고 기氣는 백성이니, 몸을 다스릴 줄 알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백송을 아끼면 나라가 편안해지듯이 기를 아끼면 몸이 온전하게 된다. 백성이 흩어지면 나라가 망하듯이 기가 고갈되면 사람은 죽는다.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고, 망한 나라는 보전할 수 없다. (《동의보감》,「내경편」, ‘신형’, 15쪽)
한글로 번역하면 2,500페이지에 달하는 《동의보감》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라는 다섯 가지 큰 범주로 나뉘어진다. 우리의 몸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자연과 우리 몸의 관계를 살피고 난 연후에야 병과 그 병의 치료법을 탐구하는 데에로 나아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동의보감》은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의서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하는 자연과학 전체를 아우르는 책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 질병이란 특수한 고통과 결여의 상태가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반해야 할 필연적 조건이다... 체질에 따라, 시공간에 따라 모두 다르긴 하지만 모든 존재는 원초적으로 질병을 안고 태어날 수밖에 없다. 아니, 질병이 곧 존재의 표현형식이다.” (pp.132~133)
허준에 대한 인물 탐구, 의학적 글쓰기의 또다른 양식, 정기신, 양생술, 몸, 오장육부, 병과 약, 여성의 몸으로 정리될 수 있는 여덟 개의 장으로 《동의보감》을 살피는 저자 또한 《동의보감》을 하나의 의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인문서로 보는 듯 하다. 그 안에는 그저 병과 그 치료법이 아니라 자연이 깃든 음양오행과 이를 고스란히 우리의 몸에 병치시키는 허준의 방식이 드러나고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지금 보통의 사람들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근대 이전의 귀족계층들이 누리는 것보다 훨씬 수준이 높다. 아무리 힘들다고 아우성을 쳐도 사냥이나 농사를 짓고 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쓰지 않는다. 대신 망상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다... 그 최악의 버전이 ‘묻지마 자살’이나 ‘묻지마 살인’이다. 밖으로 발산되지 못한 정기가 안으로 누적되면서 임계점을 넘어 버리면 폭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밖을 향하면 살인이 되고 안으로 향하면 자살이 된다. 방향만 다를 뿐 존재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파괴본능, 곧 죽음을 향한 질주라는 점에선 동일한 셈이다.” (p.178)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병과 약의 관점이 아니라 보다 넓은 시야로 《동의보감》을 살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동의보감’식의 인간과 자연과 병과 약의 이해는 바로 지금 우리들에 대한 현명한 판단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실 현재의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 용어들을 이해하는 일이 까다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굳이 그 용어 하나하나에 집중하지 않더라도 책 전체를 통하여 저자가 전달하는 바는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 병이란 몸과 외부 사이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초목에서 꽃이 피어나듯, 우리 몸에선 수많은 병들이 발생한다. 꽃이 울긋불긋하듯, 병들도 오색찬란하다...” (p.296)
특히 병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를 나무라며 새로운 접근을 지향하도록 만드는 부분이 마음에 든다. 병과 대척하며 그것을 적으로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병의 요인을 갖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지적과 함께 오색찬란한 꽃과도 같은 것으로 병을 치환하는 방식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봄, 여름, 가을과 겨울이라는 순환으로 하나의 사이클을 마무리 짓지만, 바로 그 겨울의 잉태를 발판으로 삼아 또 다른 봄을 표현해내는 자연처럼, 우리들의 몸 또한 시간이 지나면 쇠락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러한 쇠락의 뒤에는 또 다른 양태의 삶이 깃들게 되리라는 것이 이치가 아닐까. 그나저나 책을 읽으며 《동의보감》전체를 살펴볼 욕심을 잠시 가져보기도 하였으나, 쇠락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욕심이 병을 적으로 만들 듯 이 또한 역시 욕심일 수도 있겠다, 싶어 슬그머니 마음을 접는다.
고미숙 /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 북드라망 / 464쪽 / 2012 (2011)
ps. 책의 에필로그 즈음에 실린 명의 편작에 대한 글이 재미있다. 조금 길지만 옮겨 놓자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동양의 전설적인 명의名醫 편작한테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두 형이 있었다. 형제 모두가 의술의 대가였는데, 큰형은 병이 걸리기 전, 곧 미병단계에서 치료를 했다고 한다. 환자가 되기 전에 손을 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의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환자가 없으니 의사도 없는 경지라고나 할까. 작은형은 그보다는 조금 떨어져서 초기 단계의 병을 고치는 의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소소한’ 병을 고치는 아마추어 의사라고 생각했다. 병이 작으면 의술이 권위를 행사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막내인 편작은 병이 극심하게 진행된 상태의 환자들을 주로 고쳤다. 그래서 불치병을 고치는 명의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는 것. 병의 스케일에 따라 의원의 명망도 높아진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편작의 집안에선 편작을 제일 하수로 취급했다고 한다.” (쑨리치 외, 『천고의 명의들』, 류방승 옮김, 옥당, 2009, 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