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끝의 달콤한 꿀을 탐하듯 위험천만하였던 사랑들이여...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가을이 왔는데, 물가의 메뚜기들은 대가리가 굵어졌고 굵은 대가리가 여름내 햇볕에 그을려 누렇게 변해 있었다. 메뚜기 대가리에도 가을은 칼로 치듯이 왔다. 그것들도 생로병사가 있어서 이 가을에 땅 위의 모든 메뚜기들은 죽어야 하리. 그 물가에서 온 여름을 혼자서 놀았다. 놀았다기보다는 주저앉아 있었다. 사랑은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이라고, 그 갯벌은 가르쳐 주었다. 내 영세한 사랑에도 풍경이 있다면, 아마도 이 빈곤한 물가의 저녁 썰물일 것이다. 사랑은 물가에 주저앉은 속수무책이다.” - 김훈, (p.10)
첫 번째 글은 김훈의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남성적이라는 단어와 서정적이라는 단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독보적인 김훈의 산문은 역시나 읽는 우리들을 ‘속수무책’으로 만든다. 강할 때는 강하게, 하지만 그 이면의 부드러움은 또 부드러움대로 유지하는, 겉은 익혀졌지만 씹으면 육즙이 그대로 드러나는 명품 한우라도 씹는 양 녹아내리는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저 행복하다. (도무지 씹어 삼킬 도리가 없는 질긴 문장, 혹은 아예 씹는 맛을 즐길 여지가 없는 문장들이 얼마나 많은가.) 산문 속 ‘사랑’은 어딘가로 가고 김훈의 문장 옆에 나는 ‘속수무책’ 주저앉아 있을 뿐이다.
책에 실린 열일곱 편의 산문들은 이처럼 ‘사랑’이라는 주제를 공통분모로 삼고 있다. 형식은 자유분방하여 어떤 이는 칼럼의 형태로 또 다른 이는 소설의 형태로 자신의 사랑(을 허구화시키기도 하고, 내처 곧이곧대로 드러내기도 하면서) 혹은 사랑 일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 토대에 제 사적 삶을 두기도 하고, 제 문학적 페르소나의 삶을 두기도 하면서 말이다. 예를 들어 아래의 전경린은 후자의 경우이다.
“내 소설 속의 여자들은 사랑을 하고 있거나 사랑을 끝냈거나 사랑을 찾아 떠나는 여자들이다... 생명의 유기체인 이 공활한 세계 내에서, 타자들의 구성체인 이 사회 공중 속에서, 역할의 구성체인 가족 속에서, 사랑만이 한 개인에게 진정으로 사적인 것이며 일백 퍼센트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며 자신이 각성할 수 있는 현재형이며 어떤 상대성도 없이, 절대적 광휘로 빛나기 때문이다... 그 여자들이 사랑 없는 세상에서 굳이 눈을 떠야 할까?” - 전경린, (p.53)
자신의 소설 속 여자들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당당하게 밝히니, 심장의 자크를 열어버릴 것 같은 작가의 문장이 어디서 나오게 되는지도 은연 중 유추할 수 있다. 그 무엇이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 만큼의 간절함을 추동케 할 수 있을 것인며, 그때의 간절함은 그 누구와도 공유가 불가능한 (심지어 그 간절함의 수용자여야 하는 사람을 포함하여) 것이니, 그 비감함을 포착하는 행위를 전경린은 내내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들을 통하여 수행해왔다.
물론 모든 사랑이 이토록 추상적이고 제어할 수 없는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테니, 산문집의 막바지로 가면 그래도 손에 잡힐 것 같은 사랑, 이상적이지만 일상화가 가능한 사랑이 실려 있기도 하다. 역시 이러한 사랑은 나이든 작가의 입을 통하여 발설될 때 좀더 설득력이 있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은 소설가 박범신이니, 그는 이제 말랑말랑하여 오히려 손에 잡히지 않는 사랑말고, 자와 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해진 사랑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시간은 단지 사랑을 일상화시키는 역할로 끝나지 않는다. 일상화는 슬픈 일이지만 일상화조차 견뎌내고 나면 다른 것들, 이를테면 참된 인간 우의로서의 향기로운 사랑이 찾아든다. 그때 만나는 사랑은 어느덧 유리그릇이 아니라 금강석처럼 변해 있어 내 손에서 설령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쉽게 깨뜨려지지 않는다.” - 박범신, (p.261)
사랑에 대한 진수성찬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하지만 마음에 맞는 몇몇 글들을 반찬으로 삼아, 그리고 자신의 마음 속에서 불러낸 사랑을 메인 요리로 삼아 읽기에 부담스럽지는 않다. 고백하자면, 내가 불러낸 메인 요리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보였던 반찬은 그만, 책에 실린 열일곱 편의 산문을 모두 읽고 난 다음, 에필로그에서 발견하였다. 아래에 옮겨 놓기로 한다. 지중해 나라 그리스의 속담이다.
‘사랑은 날카로운 칼 끝에 발라져 있는 달콤한 꿀과도 같다.’
김훈, 김인숙, 김용택, 전경린, 박수영, 공선옥, 김갑수, 유용주, 윤대녕, 윤광준, 이상은, 정길연, 최재봉, 하성란, 함정임, 박범신, 이윤기 / 사랑(에 대한 열일곱 개의 기억, 열일곱 가지)풍경 / 섬앤섬 / 279쪽 / 2012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