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처럼 둥글둥글 부드럽고 훈훈하게...
*2013년 2월 28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오랜만에 요시모토 바나나를 읽었다. 과거의 감흥을 느끼지 못한지는 오래 되었다. 조금은 고깝게 바나나의 소설을 읽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다분히 우연에 기대는 작가의 제스처나 비현실적인 현실을 창조하는 어줍잖음에 그저 동화되기로 하였다. 그렇게까지 날카로워질 필요가 뭐가 있나 싶은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나는 요즘 꽤 날카로워져 있는 것이다.
「유령의 집」.
반드시 그러할 수밖에 없었어, 라는 필연성이 아니라 ‘왠지 그런 느낌이 든다’는 우연성에 기반한 요시모토 바나나의 특징은 여전하다. 하지만 ‘왠지’ 훈훈하게 여겨진다. “... 그 구름 낀 하늘 아래, 유령이 나오는 따뜻한 방에서 오리털 이불에 휘감겨 나누었던 섹스 이상의 섹스는 절대 없으리라.” (pp.62~63) 한 동네에서 만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친해진, 그 남자의 집에서 살고 있다는 노부부 유령의 일상, 그리고 그 위에 조용히 겹쳐지던 남녀의 섹스는 시간을 훌쩍 뛰어 넘어 두 사람의 결혼으로 이어진다. 한껏 솟구치는 젊은 남녀와 흐릿한 심령의 실루엣으로만 존재하게 된 노부부 유령 사이의 간극을 없애는 작가의 스킬이 마음에 든다.
「엄마!」.
애인은 있고 조부몬의 사랑 속에서 자랐지만 엄마의 부재라는 선천적인 빈약함을 가지고 있던 나의 이야기이다. “나 하나쯤, 이 세상에 있어도 그리 큰 공간은 차지하지 않는다. 늘 그렇게 생각했다. 인간은 언제 사라져도 모두들 마침내는 그 부재에 익숙해진다. 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없어진 풍경을, 그 안에서 살아가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상하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p.106) 야마조에씨의 음식 테러로 인하여 겪은 죽음의 고비, 그 고비는 그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삶의 기점이 되었다.
「따뜻하지 않아」.
“마코토는 무겁다는 말 한마디 없이, 소파의 등받이에 만화를 올려놓고, 우리 엄마가 만든 딱딱해서 이가 부러질 것만 같은 파운드 케이크를 오물오물 먹고 있었다. 오물거리는 울림이 무릎까지 전달되어 내 머리까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p.148) 어린 시절의 추억 한 토막이 잘 오려져서 옮겨진 느낌이다. 작고 사소한 상황이나 장면에 대한 작가의 표현에서 위로를 받은 느낌이다.
「도모 짱의 행복」.
도모 짱의 짝사랑에는 어떤 결기가 없어서 안심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좋아하는 감정 자체에 흠뻑 빠지는 것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 문제는 그러한 자신의 감정에 어떤 결기를 싣고, 그 무게로 힘차게 밀어 올리는, 그러다가 문득 힘이 빠질 때 그 힘 그대로 밀려 내려오는 우리들이 문제인 것이겠지...
「막다른 골목의 추억」.
“... 세상에는 사람 각자의 수만큼 절망의 한계가 있는걸. 나나 너의 불행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한 많은 것들이 있고, 만일 그런 일을 당하면 우리는 그대로 엎어져서 바로 죽을 거야. 그러니까 우린 그나마 행복하고 편안한 거야. 그렇지만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pp.202~203) 오랜 시간 사귄 남자 친구의 집에 들렀다가 그 집에 머물고 있는 그의 새로운 여자와 맞닥뜨려야 했던 미미, 그러한 미미에게 위와 같은 말을 해주는 니시야마 같은 지인이 있다면 좋겠다.
요시모토 바나나 / 김난주 역 / 막다른 골목의 추억 (デッドエンドの思い出) / 민음사 / 228쪽 / 2012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