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질곡을 가로지르면서도 특유의 활기로 넘쳐나는 우화 소설...
책이 준 감동이 훌륭하고 재미가 출중하여 나이를 먹으면 꼭 다시 읽어봐야겠다, 마음속에 저장을 해놓은 작가들이 여럿 있다. 물론 그 저장고의 문을 열어야 하는 때를 따로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으니, 그저 불쑥 어떤 계기가 생기기리를 기다렸을 뿐이다. 이탈로 칼비노도 바로 그러한 작가 중 한 명이었고, 이제 새롭게 문학의 문턱을 넘으려는 지인에게 책을 빌려준 것이 빌미가 되어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이라고 불리우는 책들 중 첫 번째 권인 《반쪼가리 자작》을 다시 읽게 되었다. (추천한 사람을 뿌듯하게 만드는 지인의 강한 리액션이 작용한 탓도 크다. 까탈스럽기 그지 없는 지인이 무척 재미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심지어 얼른 읽고 책을 돌려달라고 보채기까지 했다.)
마르케스, 보르헤스와 함께 현대문학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진다는 뒷표지의 설명이 아니어도,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에서는 마르케스의 붐 문학, 그리고 보르헤스의 환상적 리얼리즘의 향취를 은연 중에 느낄 수 있다. (이탈로 칼비노는 이탈리아 작가이지만, 쿠바에서 태어났다. 물론 두 살 때 이탈리아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들은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을 활기가 넘치는 우화 소설이자, 선과 악의 질곡을 가로지르는 철학 소설로 만들어내고 있다.
소설은 터키와의 전쟁 중에 (십자군 전쟁 쯤이라고 보아야 할까) 몸이 산산조각이 나서, 겨우 반쪼가리만 남은 채 자신의 영지로 돌아온 메다르도 자작을 주인공으로, 그의 행각을 근거리에서 바라보며 조마조마해 하는 조카인 나를 화자로 삼아 진행된다. 이러한 나의 긴장감은 그렇게 반쪼가리인 채로 돌아온 메다르도가 하필이면 악한 쪽이라는 설정에서 비롯된다. 더군다나 이 반쪼가리 자작은 자신의 선한 부분을 전쟁터에 남겨두고, 악한 부분만으로 존재하게 된 사실에 대해서 그지없이 만족해하는 것 같다. 그 때문에 자작은 존재하지 않는 반쪽을 망토로 가린 채 자신의 영지를 돌아다니며 모든 것들, 꽃과 곤충과 심지어 사람들까지도 반쪽으로 만들고자 한다.
“...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둔감하고 무지한 전체성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거야. 나는 완전해. 그리고 내게는 모든 것들이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막연하고 어리석게 보여. 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건 껍질에 지나지 않았어. 우연히 네 자신이 반쪽이 된다면 난 너에게 축하를 하겠다. 얘야, 넌 온전한 두뇌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지식 이외의 사실들을 알게 될 거야. 너는 너 자신과 세계의 반쪽을 잃어버리게 되겠지만 나머지 반쪽은 더욱 깊고 값어치 있는 수천 가지의 모습을 가질 수 있지. 그리고 너는 모든 것을 반쪽으로 만들고 너의 이미지에 맞춰 파괴시켜 버리고 싶을 거야. 왜냐하면 아름다움과 지혜와 정당성은 바로 조각난 것들 속에만 있기 때문이란다.” (p.61)
하지만 이러한 그의 행각은 파멜라라는 여인의 등장 앞에서 주춤한다. 일상적인 생활의 일환으로 여성을 원하였던 악한 반쪼가리 자작은 파멜라를 향한 구애의 과정에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아주 조금 느끼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전쟁터에서 갈라졌던 자작의 선한 반쪼가리가 등장한다. 전쟁터에서 영지까지 먼 거리를 순례자라도 되는 양 선한 행각으로 채우며 여행한 그가 악한 반쪼가리 자작이 아주 잠시, 그리고 조금 흔들리게 되는 그 순간 나타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절대악 속에서 평온하기마 하였던 반쪼가리 자작의 심장에 아주 작은 균열, 그러니까 파멜라로 인하여 벌어진 틈이 생기는 순간 선한 반쪼가리가 불쑥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 이건 반쪽자리 인간의 선이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사물에 대해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야. 사람이든 사물이든 각각 그들 나름의 불완전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내가 성한 사람이었을 때 난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머거리처럼 움직였고 도처에 흩어져 있는 고통과 상처들을 느낄 수 없었어. 성한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 있지. 반쪼가리가 되었거나 뿌리가 뽑혀 있는 존재는 나만이 아니야... 모든 사람들이 악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면서 너 자신도 치료할 수 있을 거야.” (p.90)
그러니까 악한 반쪼가리 자작은 사라진 선함으로 완벽할 수 있었지만, 선한 반쪼가리 자작은 끊임없이 악을 인식하며 불안정하였다. 그리고 악함은 선이 사라졌을 때 특유의 어둠으로 완벽해지면서 절대악이 되고, 선함은 그 절대악이 있을 때 그 존재 가치가 효용을 넘어서는 절대선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이렇게 절대적인 악과 절대적인 선이 존재하는 테랄바는 ‘자비와 공포’가 공존하는 시간을 보내게 되고, 테랄바의 주민들은 ‘비인간적인 사악함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인 비인간적인 덕성’의 사이에서 스스로를 상실해 가게 된다. 하지만 절대선과 절대악이 오랜 시간 공존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수도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었던 두 반쪼가리 자작은 파멜라와의 결혼이라는 현실적인 상황 앞에서 결투를 치르게 되고, 그 결과 다시금 하나의 자작으로 돌아오게 된다.
“... 삼촌은 사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사악함과 선함이 함께 혼합되어 있는 온전한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표면적으로는 반쪽이 되기 전과 달라진 점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두 반쪽이 재결합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주 현명해질 수 있었다. 그는 행복한 생활을 했고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올바른 통치를 했다. 아마도 우리는 자작이 온전한 인간으로 돌아옴으로써 놀랄 만큼 행복한 시대가 열리리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세상이 아주 복잡해져서 온전한 자작 혼자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 (p.121)
아이러니 가득한 소설은 결국 마지막까지도 명확한 결론을 우리에게 건네지는 않는다. 선과 악이 하나로 합쳐져 보다 온전한 사람이 된 자작, 그가 다스리는 행복한 테랄바 마을을 꿈 꾸었던 독자들을 이탈로 칼비노는 새로운 미궁으로 빠뜨린다.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을 모두 경험한 자작 개인은 행복했을 지언정, 애초부터 선과 악이 공존했던 테랄바 마을의 주민들은 자작의 다스림과는 무관하게 여전히, 아니 세상이 복잡해짐에 따라서 오히려 더 행복에는 도달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끝까지 독자들을 쥐고 흔드니 활기가 넘치면서, 동시에 마지막까지 독자들을 혼돈의 수렁에서 건져주지 않는 이탈로 칼비노의 스타일은 유지된다.
더불어 이러한 소설 전체의 맥락과 무관하지 않은 여러 등장인물은 서사를 풍성하고 또 재미있게 게 만들어주고 있다. 자작을 근거리에서 바라보며 성장통을 겪어내는 나를 비롯하여 유약하기 그지 없지만 결국 선한 자작과 악한 자작을 하나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떠나는 닥터 트렐로니, 자작과 나 모두를 키워내는 절대적인 모성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는 유모 세바스티아나를 비롯해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양극단을 보여주는 듯한 광기로 가득한 문둥이 마을의 문둥이들과 엄격하기 그지 없는 위그노 마을의 위그노들이 바로 그들이다. 자작과 이들이 합작해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탈로 칼비노의 마을에 한 번 빠져볼만 하다.
이탈로 칼비노 / 이현경 역 / 반쪼가리 자작 (Il Visconte Dimezzato) / 1997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