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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슈이치 《원숭이와 게의 전쟁》

'착함'이라는 키워드로 '인과응보'가 이루어지니...

by 우주에부는바람

요시다 슈이치의 ‘착함’ 이라는 키워드가 노골적으로 피력되는 소설 중의 하나라고 분류해볼 수 있겠다. ‘원숭이와 게의 전쟁’ 이라는 제목 자체가 ‘어미 게를 속이고 죽인 교활한 원숭이에게 새끼 게들이 앙갚음을 하는 내용의 전래 동화’에서 비롯된 것이니 억울함을 지닌 선한 인간이 결국 악한 인간을 징벌하는 인과응보의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작가의 의도는 무수히 많은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소노 유코의 아래와 같은 말에서도 뻔하게 드러난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남을 속이는 인간에게도 그 인간 나름의 논리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남을 속일 수 있는 거라고. 결국 남을 속이는 인간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람이에요. 반대로 속아 넘어간 쪽은 자기가 정말로 옳은지 늘 의심해 볼 수 있는 인간인 거죠. 본래는 그쪽이 인간으로서 더 옳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요즘 세상은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인간은 아주 쉽게 내동댕이쳐요. 금세 발목이 잡히는 거죠. 옳다고 주장하는 자만이 옳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p.525)

하지만 이렇게 의도가 뻔하다고 해서 재미없는 소설이 되고 마는 것은 아니다. (실은 오랜만에 책을 읽다가 뜨는 해를 보고 말았다. 요시다 슈이치 소설의 흡입력만큼은 정말 끝내준다.) 하나의 사건이 또 다른 사건의 결과가 되거나 원인이 되고, 하나의 인물이 또 다른 인물에 영향을 끼치거나 영향을 받는 식으로 끊임없이 소설은 요동친다. 그리고 간간히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숨 돌릴 여유를 주며 소설 속 인물의 설명에 고개 끄덕이게도 되니, 이 또한 요시다 슈이치가 던지는 재미의 일종이다.

“... 도모키라는 남자는 굉장히 알기 힘든 인간이라 만 엔이 있으면 멋대로 써 버리지만, 혹시 십만 엔이 있으면 틀림없이 미쓰키에게 다 줄 것 같은 남자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p.56)

소설은 섬에 살던 미쓰키가 젖먹이인 에이타를 품에 안고 도쿄의 유흥가 가부키초에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아이의 아빠인 도모키를 찾아나선 이 행보에서 미쓰키는 도모키를 잘 아는 준페이를 만나게 되고, 준페이가 일하는 술집의 마담 미키와 연결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한 편에는 준페이가 맞닥뜨리게 된 뺑소니 사건을 통하여 오쿠노 히로시와 그의 동생인 첼리스트 미나토 게이지와 그 주변 인물들이 자리잡는다.

“술집은 12시, 1시면 확실하게 끝나서 편한 거 아닌가. 최근에는 가부키초 주변에도 2시, 3시, 개중에는 새벽녘까지 영업하는 가게도 있는 모양인데, 그러면 끝이 없잖아. 본래는 가게 쪽에서 확실하게 기준을 잡아 주는 게 도리지. 열심히 일할 수 있어서 비싼 돈을 내고 수 마시러 오는 거니까 일을 제대로 못하면 마시러 올 수도 없다는 걸 모르나? ...” (p.223)

가부기초의 술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돌아가니 눈물 짜내는 밑바닥 인생의 성공 스토리인가 싶지만 의외로 이들의 삶은 당당하다. 그리고 이들의 당당함은 위와 같이 자신의 하는 일에 스스로 부여하는 선한 철학이 있어 가능하다. 오히려 추악한 것은 정치인을 비롯해 사회적 강자이고, 소설은 바로 사회적 약자라고 할 수 있던 준페이가 선거를 통해 도쿠다 시게미쓰를 꺾음으로써 통쾌해진다.

“최근 들어 이런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자다 깨다 하는 하루가 사흘로 느껴질 때가 있는가 하면, 똑같이 자다 깨다 하는 하루라도 아침부터 고작 한 시간밖에 안 지난 것 같은 날도 있었다... 고양이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 흐름과는 다르다고 하는데, 어쩌면 지금 자신은 고양이와 같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p.269)

물론 재미에 버금가는 큰 감명을 주는 소설은 아니다. (이런 책이라며 페이버백으로 좀 싼값에 출간이 되어도 될텐데...) 하지만 소소한 볼거리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젖먹이 에이타의 반대편에 있는 듯한 백 살을 눈앞에 둔 사와 할머니가 나오는 장면이 때때로 흐뭇하였다. 나이 든 자가 보여주는 느릿하지만 모든 것을 품에 안는 모습을 통해, 역시 나이를 열심히 먹고 있는 독자인 내가 늙어감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살짝 벗어날 수도 있었다고나 할까...



요시다 슈이치 / 이영미 역 / 원숭이와 게의 전쟁 (平成猿蟹合戰圖) / 은행나무 / 552쪽 / 201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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