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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입체적인 사색의 지도자를 선택할 것이냐, 욕망에 사로잡힌 평면의 지도자를

by 우주에부는바람

*2012년 12월 18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중 ‘현제의 세기’ 편에 있는, 로마의 황금 시대를 이끈 황제들 중의 한 명인 하드리아누스를 읽다가, 오래전 내게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해주었던 소설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을 떠올렸다. 마침 좀더 선별된 텍스트를 읽고 싶다는 마음과도 부합하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선을 앞둔 지금, 로마 제국을 이끌었던 하드리아누스를 읽는 일이 또한 의미있는 것이라 여겨졌다. 이십여년전에 발간된 책을 그대로 읽다보니 문체의 어색함으로 고생하였고, 가벼운 글들에 잠식당한 사고 회로가 난무하는 추상어와 마침표 찍기를 주저하는 긴 문장 탓에 번번히 멈추었지만 대선일 전에 다 읽을 수는 있었다.

마침 문재인과 박근혜 사이의 대선 티비 토론을 보고 난 후 (마지막 멘트에서 한숨을 내쉰 문재인 후보와 같이)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였고 그 이유는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유수의 세계 언론들이 독재자의 딸이라고 칭하는 박근혜가 가지고 있는 빈약한 논리 체계에 한숨을 쉬어야 했고, 그러한 빈약한 논리를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밀어붙이는 사고 체계에 경악해야 했다. 행동하는 로맨티스트라 불릴만한 노무현 전 대통령, 그리고 사색하는 인본주의자와도 같은 문재인 후보와 비교했을 때 박근혜 후보는 그저 물에 비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뿐이고, 수첩의 내용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믿는 철부지 공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박근혜는 이번 대선의 가장 유력한 후보이다.

그녀는 자신의 15년 정치 경력을 대단한 캐리어인 양 되뇌이지만 이 또한 허무맹랑한 신화에 불과해 보인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TK 지역의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절차적 민주화를 넘어 실제적 민주화의 길에 들어서는 사회에 위기감을 느낀 보수 세력들에 의해 중앙 무대로 끌려 나왔을 뿐이다. 그녀의 정치는 말하지 않고 버팀으로써 우위를 점하는 전술로 일관되었을 뿐이며, 가신들이 쳐놓은 장막 안에서 두문불출하다 절대적인 타이밍의 순간 장막을 걷고 모습을 나타내고, 적당한 미소와 함께 제 지지자들과 악수를 하는 것으로 전세를 뒤집는 전략으로 일관해왔을 뿐이다. 제 스스로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음으로써 모든 책임으로부터 회피하는 이 무언과 무념의 전략 전술을 통하여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과반수의 국민들은 이 신화에 흠뻑 빠져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유명한 전기 소설 속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저 반대편에 박근혜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역사상 가장 광대하였던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인물에게서 파악되는 인간의 모습을 박근혜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랑하고 갈등하고 고뇌하며 부딪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그저 참모들이 적어주는 수첩 속의 멘트를 카메라 앞에서 던지고, 수첩을 벗어난 질문 앞에서 당황하거나 짜증낼 줄 아는 유아기적 성정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인 그녀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를 불안하게 아니 비참하게 아니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지금 대한민국은 사색이 아니라 욕망에 더욱 크게 좌우되는 사회이다.

“나는 세상의 철학이 다 합쳐도 노예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르리라 믿지 않는다. 명칭을 바꾸는 정도에 불과하리라. 나는 우리나라의 노예제도보다, 교활한 터이라, 더 지독한 형태의 예속상태를 상상할 수 있다. 자신들이 사실은 예속되어 있는데 자유롭다고 믿으며 만족해 하는 어리석은 기계로 인간을 변모시키기에 이른다든지, 사람들에게 인간적 여가나 쾌락을 배제하고 만족들에게서 보는 전쟁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끈질긴 일에의 취미를 개발시킨다든지 하는 교활한 방법으로 말이다. 정신의 예속이나 혹은 인간적 상상의 예속보다는 나는 우리의 실질적인 노예제도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p.126)

다시 책으로 돌아오도록 하자. 2세기 로마의 지도자였던 이의 (물론 20세기 초반 소설가에 의해 환생한 것이지만) 생각은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의 정곡을 찌른다. 정체성을 상실한 언론이 전달하는 왜곡된 정보에 예속된 이들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보편적인 복지와 인간적인 삶에의 지향 대신 경제적 동물로 변한 이들이 하드리아누스 치하의 노예보다 낫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20여년의 통치 기간 중 무려 12년을 로마가 아닌 속주를 순행하였던 이 황제가 바라본 세상과 그것으로부터 길어올려진 현명함은 그로부터 2000년 가까이 흐른 현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다.

“... 나는 우리 모두가 거치게 마련인 이 변혁에, 포기하는 심장, 정지하는 두뇌, 생명을 흡입하기를 멈추는 허파에, 생각으로 이르러 보려고 노력했다. 나도 그와 유사한 전복을 맞이하게 되리라. 나도 어느 날엔가 죽을 것이다. 그러나 임종은 하나 하나 다른 것이라, 그의 임종을 상상하기 위한 나의 노력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작위에 이를 뿐이었다. 그는 홀로 죽었다.” (p.218)

물론 이처럼 오래전, 그것도 서양 제국의 황제를 통하여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19세기 고고학자들이 밖으로부터 했던 일을 안에서부터 다시 하는 작업’이라고 스스로 명명하며 이 전기 소설 작업에 꽤 오랜 기간 공을 들인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덕분이다. 그녀는 다년간 이 황제와 관련한 자료를 수집하였고 이를 토대로 하드리아누스 황제라는 인물에 빙의라도 한 듯 글을 써냈다. 특히 측근이자 사랑의 대상이기도 했던 안토니누스의 죽음 앞에서 무너져 내린 심경을 토로하는 장면은 압권이기도 하다. 이러한 글쓰기가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아마도 전기 소설의 길잡이로 이보다 더 좋은 발언은 없으리라 여겨지므로 조금 길게 인용하자면) 아래와 같이 작가 스스로가 작성한 이 소설에 관한 노트에 적혀 있는 작가의 작업 규칙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업 규칙 : 모든 것을 배울 것, 모두 읽을 것, 온갖 것의 정보를 수집할 것... 수많은 자료철을 통하여 과거 일들에 내포된 시사성을 추구하며, 이 돌이 얼굴들에다 역동성을, 살아 있는 유연성을 되돌려주도록 노력할 것. 두 개의 텍스트가, 두 개의 긍정이, 두 개의 사상이 서로 대립될 때, 하나로 다른 것을 무화시키지 말고 둘을 조화시키도록 할 것. 그들 둘에서 양면성을 볼 것이며, 동일 실상의 연쇄적인 두 상태를 볼 것이며, 복합적이기 때문에 설득력 있는 현실을, 다중적이라서 인간적인 현실을 볼 것. 2세기의 텍스트를 2세기의 눈으로, 2세기의 영혼으로, 2세기의 감각들로 읽도록 노력할 것. 그 텍스트를 모수(母水)가 되는 금시대의 실상에 푹 잠기게 할 것, 이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차근차근 축적되어온 모든 사상들, 모든 감정들을 최대한 배제시킬 것. 그렇지만, 그러나 신중히, 그러나 단지 준비 과정용으로만, 접근 혹은 대조 검증의 가능성을 사용하고, 우리를 이 텍스트로부터, 이 실상으로부터, 이 남자로부터 분리시키고 있는 많은 세기들이나 많은 시간들에 의해 차츰차츰 형성되어온 새로운 전망들을 사용할 것. 그것들을 어떤 점에서 시간 선상의 어느 특정 지점 쪽으로 되돌아오는 길 위에 세운 여러 푯말들로서 이용할 것. 자신의 그림자가 지지 않도록 할 것이고, 숨결의 김이 거울의 박 위로 퍼져 나감을 허용치 말 것이며, 오감에 의한 감명에서나 정신의 활동작용에서 우리 안의 가장 지속적이로 가장 근본이 되는 것만을 취하여 이 사람들과의 접촉지점으로서 삼을 것. 이 사람들은 우리처럼 올리브를 깨먹었고 포도주를 마셨고 손가락을 꿀을 떠먹었으며 매서운 바람과 세찬 비와 싸웠고 여름엔 플라타너스의 그림자를 찾아고, 그리고 즐기고, 그리고 생각했고, 그리고 늙었고, 그리고 죽었다.” (pp.317~318)

작가는 이러한 작업 규칙에 따라 2세기의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를 20세기에 되살려냈다. 더불어 그는 아래와 같이 자신이 하드리아누스 황제라는 인간을 평면화된 모습으로 보지 않고, 구획화되지 않는, 태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입체적인 인간으로 보았다고 실토한다. 그렇기에 그 엄청난 시간의 간극을 뚫고 우리는 하드리아누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 한 인간 삶의 그래프를 끝까지 주시할 것. 이 인간 삶은, 사람들이 무어라든, 하나의 수평선과 두 개의 수직선으로 구성되지 않고, 세 개의 구불거리는 한없이 늘어져, 끊임없이 접근되었다가, 끊임없이 갈라서는 세 선으로 구성되고 있다. 한 남자가 자신이라고 믿었던 자기, 되고자 원했던 자기, 그리고 실제 자신이었던 자기.” (p.327)

그리고 다시 한 번, 하루 앞으로 다가온 우리의 대선을 생각해본다. 우리의 잘못된 선택은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만큼이나 직선적이고 평면적인 지도자를 섬겨야 하는 수치스러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바야흐로 21세기이다. 그래 다른 모든 것들은 조금 미룬다고 치자. 하지만 한참 뒷걸음질을 치고 만 실질적인 민주화의 시계를 다시금 정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그리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필요함을 시인한 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국제 사회의 흐름을 적절히 이용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훨씬 더 입체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 수첩 암기식 공주 스타일의 지도자 아래에서 어떻게 이 풍진 세상을 헤쳐나갈 것이냔 말이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 남수인 역 / 하드리아누스의 회상록 (Memoires d'Hadrine) / 세계사 / 357쪽 / 1995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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