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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도덕적 감각'을 버려서라도 얻고 싶은 '미적 감각'으로 충만한 문장들.

by 우주에부는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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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롤리타》를 읽은 것은 이십여 년 전이었다. 아무 치장 없이도 반짝거리는 빛이 나던 이십대 초반이었고, 나만큼이나 반짝거리던 후배가 책을 잠시 빌려줬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기 시작하였고 그 미문에 흠뻑 빠져들었다. 저자인 나보코프가 모국어도 아닌 영어로 쓴 작품이라는데, 어떻게 이리도 아름다운 문장들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지, 고개를 내두르며 탄식하였던 것 같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로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그녀는 로, 아침에는 한쪽 양말을 신고 사 피트 십 인치의 평범한 로. 그녀는 바지를 입으면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으로는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안에서는 언제나 롤리타였다.” (p.15, 1권)


그러니까 소설의 1부의 시작을 알리는 위와 같은 문장은 시청각을 아우르는 에로틱한 아름다움으로 농밀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나보코프의 문장을 두고 에릭 오르세나라는 프랑스 작가는 ‘나비의 교태’라고 표현하였다. (말이 나온 김에 에릭 오르세나의 《두 해 여름》이라는 소설을 추천해야겠다. 나보코프의 소설을 번역한다는 설정을 지니고 있는 소설인데, 산뜻하게 읽히면서도 동시에 의미심장하다.)


사실 마력이 넘치는 문장에 휘둘리다보니 그 소설의 내용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저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만들어낼 정도의 힘을 지닌, 중년 남자와 어린 소녀의 뭐라고 이름붙이기 힘든 (그러니 아예 새로운 단어가 필요하였겠지) 관계 혹은 그 관계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영화 등의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많이 접하게 되다보니, 소설의 세세한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대부분은 이 소설의 내용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게 되는 경향이 있다.)


“... 마침내 이십오 년이 지나 나는 그녀의 마력에서 벗어났다. 오직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그녀에 의해서.” (p.25, 1권)


그렇게 우리는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가 롤리타를 만나기 전까지의 과정, 그러니까 위의 문장에서 드러나는 이십오 년 전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유한 계급의 자식으로 태어난 험버트는 열세 살 때 애너벨이라는 소녀와 사랑에 빠졌지만 결국 주변의 방해로 그 사랑을 완료하지 못하고, 그녀가 병으로 죽은 이후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완료되지 못한 사랑의 정념을 품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저에 깔지 않고서는, 험버트가 아홉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의 님펫에 대해서만 탐닉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데도 말이다.


그러한 자신 내부의 치유하기 힘든 애정과 욕망의 매커니즘을 달래기 위하여 험버트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도 아니다. 험버트는 발레리아라는 여인과 (물론 천성적으로 어린애 같은 뉘앙스를 지녔기 때문이지만) 결혼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수습하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아내의 불륜으로 이러한 수습책 또한 좌절되고, 결국 요양원에서 분노와 외로움을 달래다 서른 일곱 살에 미국 뉴저지의 램즈데일이라는 곳까지 오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롤리타를 만나고 드디어 이십 오년 전의 그녀 이사벨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 아홉 살에서 열네 살 사이의 소녀는 때로 홀린 방랑자에게 인간이라기 보다는 님프(<악마적>이라는 뜻)라는 속성으로 훨씬 숙성해 보인다. 이런 종류의 소녀를 나는 <님펫>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나 그 나이의 소녀가 모두 님펫인 것은 아니다... 님펫은 어떤 기준에 따른 미인도 아니다... 꺼질 듯한 우아함, 잡을 수 없고 속임수에 가득 차서 영혼을 조각내는 마력은 그 나이 또래 중에서도 님펫만이 갖는 매혹이다. 그것은 롤리타가 또래들과 노는 그 제한된 시간의 섬이 아니라 공시적이고 공간적인 세상에 달려 있다...” (p.27, 1권)


그렇게 절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인 님펫, 롤리타, 그의 로, 롤라, 돌리, 돌로레스와의 만남 이후 이제 험버트는 이십 오년 전에 완성시키지 못한, 어찌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나이의 제한 때문에 허용되지 않는 사랑을 완성하기 위하여 치명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롤리타가 캠핑장에 가 있는 사이 그녀의 엄마와 결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결혼은 금세 위기에 빠지고 우연한 사고로 그녀의 엄마는 죽게 된다.


그리고 이제 험버트는 의붓딸이 된 롤리타를 캠핑장에서 픽업하여 <도취된 사냥꾼>이라는 호텔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롤리타에게 자신의 정욕을 들킴으로써 (그녀의 어머니의 죽음 또한 자신의 정욕을 그녀의 어머니에게 들켰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위기에 빠지지만, 오히려 이를 이용한 듯한 롤리타에 의하여 관계를 맺게 되고, 험버트와 롤리타의 길고 긴 여정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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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질투는 그녀의 거짓으로 엮인 매끄러운 섬유의 올을 늘 깔쪽한 발톱으로 할퀴어댔다...” (p.72, 2권)


2년여가 흐른 뒤 이들 반사회적 부녀는 비어즐리에 정착하지만 이 또한 길게 지속되지는 않는다. 너무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지만 이제 막 피어나는 롤리타, 그 주변의 젊음들에 대한 반감은 두 사람 사이를 위태롭게 만들고, 이들 반사회적 부녀는 위기감 속에서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여행은 병원에 있던 롤리타가 자신들을 미행하는 듯 하던 사내와 함께 사라짐으로써 막을 내린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흐른다. 그 사이 험버트는 리타라는 여인과 함께 살게 되지만 3년이 지난 시점에서 롤리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음으로써 이야기는 또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한쪽 팔이 없는 사내의 아이를 가져 임산부가 되어 있는 열일곱살의 롤리타에게 험버트는 다시금 구애를 하지만 롤리타는 거절한다. 그리고 오히려 현재의 남편이 아닌 퀼티, 그러니까 험버트와 롤리타의 여행에 막을 내리도록 만든 사내에게 다시 돌아가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험버트를 다시 한 번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그는 이제 그가 처음 롤리타를 만났던 램즈데일로 돌아가고 애초부터 그곳에서 존재했던 극작가 퀼티를 살해한다.


그리고 이쯤에서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사실 소설이 시작되기에 앞서 저자는 이 소설은, 존 레이 주니어라는 편집자가 받은 「롤리타, 혹은 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라는 제목이 붙은 한 범죄인의 수기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수기에 실린 범죄가 1952년 구월에서 시월 사이에 한 일간지에 실려 있을 뿐, 그 내막은 아무도 아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어떤 범죄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라고 하며 저자는 이 파격적인 소설에 살짝 애매모호한 포장을 덧씌우고 있다.


지금의 기준에서도 시쳇말로 막장에 가까운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저자가 겪은 핍박을 생각한다면 (롤리타는 애초에 미국에서 출판되지 못하여 유럽에서 먼저 출판되었으며, 유럽에서의 인기를 등에 업고서야 겨우 미국에서 출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애매모호한 포장이라는 제스처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소설의 1부에서 험버트는 끊임없이 자신을 단속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 모양을 안쓰럽게 이해할 수 있다.


“나 자신이 대견했다. 미성년자의 육체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 열정의 단 꿀을 훔친 것이다. 정말이지 털끝 하나 해치지 않았다... 나는 내 수치스럽고 열렬하고 죄많은 꿈을 오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롤리타는 안전했다. 나도 안전했다. 내가 미친 듯이 소유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창조해 낸 것이었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그 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p.97, 1권)


험버트가 롤리타를 취한 것인지 아니면 롤리타가 험버트로 하여금 자신을 취하도록 조정한 것인지를 밝혀내는 일은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험버트는 위와 같은 문장을 통하여 스스로를 대견해 할 정도의 도덕적 감각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도덕적 감각은 나비처럼 연약한 것이었다. 그러니 롤리타의 몸짓이 불러일으키는 작은 일렁임에도 쉽게 날아가버리고 만다.


“... 나는 내 일에 골몰해서 그때 『도취된 사냥꾼들』이라는 단막극을 완전히 읽어볼 틈이 없었다. 그 극에서 돌로레스 헤이즈는 농부의 딸을 맡았는데 그 역은 자신이 숲의 마녀, 혹은 다이애나, 혹은 책을 온통 최면으로 몰아넣고 길 잃은 사냥꾼들을 갖가지 황홀한 몽상 속으로 끌어들이다가 마침내 그 자신이 방랑 시인(모나 달이 맡음)의 마력에 걸린다는 얘기다...” (p.93, 2권)


롤리타가 이 ‘길 잃은 사냥꾼’과도 같은 험버트를 끌어당기는 것은 그만큼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험버트를 쉽게 끌어당기는 마력을 지닌 롤리타 또한 ‘방랑 시인’과도 같은 극작가 퀼티에게는 너무 쉽게 끌어당겨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롤리타는 험버트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험버트에게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지만 퀼티에게 다시 돌아가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시사함으로써 험버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만다.


“... 아주 먼 훗날, 돌로레스 헤이즈라는 북아메리카의 소녀가 어떤 미친 놈에게 어린 시절을 빼앗겼다는 사실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그것이 증명되지 못하면(그리고 그것이 증명되면 삶은 하나의 조크에 불과하다), 나는 나의 비참함을 치료할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 우울함과 인위적인 예술로 아주 지엽적인 고통의 완화를 얻는 길 외에는. 옛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

인간들에게 도덕적 감각이란

우리가 덧없는 미적 감각에 지불해야 하는 의무다.” (p.218, 2권)


이제 험버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감각의 지불이라는 위험천만한 행위를 통하여 얻었던, 롤리타라는 미적 감각이 그렇게 덧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음을 인지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취할 수밖에 없는 선택, 롤리타가 가지고 있던 롤리타라는 아름다움의 결정체를 앗아간 퀼티를 찾아가고 살해함으로써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자 하는 최정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험버트에게 있어서의 롤리타가 재생될 수는 없다. 절대적이지만 동시에 상대적이었던 롤리타는 이제 영원히 상실되었음을 험버트는 안다, 느낀다.


“... 그때 나는 알았다, 가망 없이 가슴 아픈 것은 내 곁에 롤리타가 없어서가 아니라, 저 소리들의 어울림 속에 그녀의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기 때문임을.” (p.256, 2권)


책을 읽는 동안 작은 흥분들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흥분들이 이십여 년 전 첫 독서의 그것과 어떻게 닮았고 어떻게 다른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열세 살 때 만난 애너벨을 이십오 년이 지나 롤리타를 통해 다시 만나고 그 마력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었던 험버트를 나는 닮지 못하였다. 그렇게 이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롤리타》는 여전히 내게 마력으로 존재한다. 그러니 여정은 이제 또 다시 시작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권택영 역 / 롤리타 (Lolita) / 전2권 1권 245쪽 2권 269쪽 / 1997 (1955, 1958)



ps1. 소설이 끝나고 나면, 저자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직접 쓴 맺음말 같은 것이 등장한다. 56년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아 유럽의 초판본이 아닌 미국에서 출판이 될 당시에 들어간 글로 보인다. 이 글을 통하여 나보코프는 예술지상주의 혹은 탐미주의라고 불리울 수 있는자신의 소설관 혹은 예술관에 대해 피력하고 있으며, 자신의 소설을 단순한 포르노그래피 소설로 접근하는 오류를 범할 것에 대한 우려를 보이고 있기도 하다.


ps2. 현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나 연구논문의 숫자가 많은 것은 소설 《롤리타》가 가지는 (소아성애자의 사랑이라는 표면적인 내러티브 이외에도) 다양한 측면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범죄자의 수기가 곧 소설이라는 액자 소설 형태를 띠고 있으며 동시에 마지막에 실린 맺음말을 통하여 작가가 스스로 직접 소설에 개입하는 형태를 띠고 있기도 하다. 험버트의 수기이면서도 그가 스스로를 나, 혹은 그, 혹은 험버트라는 식으로 자신을 명기하는 방식에 혼동을 가하고 있는 것 또한 특별하다. 맥거핀처럼 소설의 1부에 등장하였던 ‘퀼티’가 사실은 어린 시절의 ‘롤리타’와 접촉하였다는 사실 또는 두 사람이 도망다니면서 처음 묵은 호텔 <도취된 사냥꾼들>이 연극의 제목이 되는 부분에서는 일종의 추리소설의 뉘앙스도 풍긴다. 이처럼 다종다양한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던지는 여러 해석의 여지들이 이 소설의 또다른 매력일 수 있겠다.


ps3. 연구논문들과는 별개로 롤리타를 매개로 한 기타 텍스트들의 생산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다. 소설 《롤리타》와는 별도로, 관련하여 내가 접한 텍스트만 하더라도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처럼 나보코프의 소설을 번역한다는 설정을 가진 에릭 오르세나의 《두 해 여름》, 롤리타를 바라보는 여성의 시각을 그리고 있는 이지민의 단편소설 <서른 살이 된 롤리타>가 있으며, 최근에 읽은 릭 게코스키의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에서도 이 소설의 출간 비화가 실려 있다. 이와 함께 (영화 <롤리타>는 별개로 치고) 몇 년 전 본 연극 <블랙버드> 또한 열두 살 앞집 소녀 우나와 이웃집 아저씨 레이의 관계라는 ‘롤리타 콤플렉스’를 보다 정신 심리학이나 범죄 사회학과 연관지으며 살피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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