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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노 도모유키 《오레오레》

'나야나'라고 외치지만 말고 '우리'라는 울타리로부터 벗어나 '나'로 거

by 우주에부는바람

 시작은 아주 미미하였다. 나, 나가노 히토시는 어느 날 자신이 들르는 패스트푸드점의 옆자리 손님이 놓고 간 핸드폰을 습득하고는 돌려주지 않은 것이 시작이었다. 딱히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그냥 그랬을 뿐이다. 그리고는 한 걸음 나아가 그, 히야마 다이키의 어머니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제 나는 마치 히야마 다이키인 양 그의 어머니에게 하소연을 하고, 설상가상 자신이 한 거짓말을 수습하기 위하여 그의 어머니를 만날 작정을 한다.


하지만 이 작은 사기로 시작된 이야기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 된다. 이 정체성 희미한 사회가 만들어낸 사소한 사기가 자아내는 범죄 소설인가 싶었는데, 히야마 다이키의 핸드폰으로 사기를 친 나가노 히토시를 맞아들인 그의 어머니는 나, 나가노 히토시를 자신의 아들인 히야마 다이키인 양 대한다. 부모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사진학과를 택하고, 사진학과를 나온 이후 사진작가로 나서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부모와의 불화 탓에 집을 뛰쳐나와 전자제품 매장의 카메라 코너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나, 나가노 히토시는 일대 혼란에 빠진다.


“... 혼자 있을 때의 나는 전원이 꺼진 물체이니까, 그냥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연료 보급만 해둬도 충분하다... 진짜 문제는 전원이 켜져 있을 때 일어난다. 그때는 정해진 틀에 사로잡혀 살아 있는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부모와 한데 섞여 살며 그들에게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 나는 끊임없이 나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래야 하면 정신이 돌아버리기 때문에, 스위치를 끌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스위치를 끌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혼자의 시간, 내가 전원을 끄고 나이기를 그만두는 시간에 나는 편안해진다. 그러나 누군가가 있으면 나는 전원이 켜진 상태여야 하며 깨어 있는 내내 나로 있어야 한다. 오로지 잠들어 있는 동안만 전원을 끌 수 있다. 그건 끔찍한 일이다.” (p.78)


나이기 위해서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혼자 사는 삶을 택했던 나, 나가노 히토시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새로운 가족인 엄마와 누나와 조카의 존재로 인해 혼란스럽다. 한술 더 떠 이러한 새로운 가족으로 인해 떠올려진 자신의 진짜 가족을 찾아갔을 때 발생한다. 자신의 엄마는 자신을 낯선 사람 취급하면서 집안에 있는 또 다른 히토시를 불러낸다. 그러니까 나의 집에는 이미 나, 나가노 히토시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나, 나가노 히토시가 히야마 다이키가 되어가고 있을 때, 또 다른 나, 나가노 히토시는 자신의 집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셈이다.


“... 이미 나는 감정이나 욕구가 가끔 일치하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우리끼리 24시간 완벽하게 일치되어 있고 싶다. 히토시가 바란다면 셋만이라도 좋으니까 언제라도 희로애락의 감정을 일치시키고 생각하는 것도 일치시켜 마치 자신이 한 사람의 커다란 자신의 일부인 것 같은 감각에 잠겨 있고 싶다...” (p.160)


하지만 히토시의 엄마는 히토시를 몰라보았지만 집안의 히토시는 자신을 찾아온 히토시의 존재를 알아본다. 게다가 방금 찾아온 히토시 이외에 또 다른 히토시가 존재하는 사실까지도 집안의 히토시를 통하여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세 사람의 히토시, 나는 우리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서로 교류하며, 은근히 세 명의 ‘나’로 이루어진 ‘우리’라는 형태에 만족하게 된다.


”왜 이런 얘기를 너희에게 해주느냐 하면, 그 악몽 같은 오레오레(나야 나)의 시절을 기억해두고 싶기 때문이다... 시대가 다르니까 우리하고는 관계없는 일이야. 그런 생각일랑 해선 안 된다. 이건 남의 일이 아니다. 너희가 잊는 순간 너희도 곧바로 오레오레가 돼버릴 거다. 오레오레는 너희가 현재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리기만을 남몰래 기다리고 있다...” (pp.313~314)


물론 이러한 교류가 안정적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 사람의 나로 이루어진 ‘우리’ 이외에도 그들의 주변에는 또다른 ‘나’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점점 세 사람 사이의 관계를 흐트러뜨리고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갑작스러운 호러 버전으로의 이전) 극한 상황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제 ‘나’에서 ‘나 아닌 다른 무엇’으로 바뀌었던 ‘나’는 무수한 우여곡절을 거쳐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그러니까 습득한 전화를 통한 ‘사기’, 내가 아닌 또 다른 나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각성’, 계속해서 늘어만 가는 주변의 무수한 나들을 확인하게 되는 ‘증식’, 나로 이루어져 완벽해 보였던 집합체의 ‘붕괴’, 나의 죽음과 그것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의 ‘전생轉生’, 그리고 사라져버렸던 ‘나’의 ‘부활’이라는 과정이 소설 속에서 각각의 챕터로 구분되어 서술되고 있다.


범죄 미스터리인 양 시작이 되었다가 사회학적인 또는 존재론적인 고민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심리소설로 발전하고, 잠시 고딕 호러물로 방향을 틀었다가, 회고 양식의 액자소설풍으로 끝을 맺고 있는 소설은 읽기에 꽤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고딕체로 구분이 되고 있기도 하고, 나름의 명명법으로 구분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나와 나가 수정되고, 추가되고, 중첩되고, 삭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곰곰이 따져보자니 ‘나’가 존재 해야 나 아닌 것들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게 만드는 세상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일이 되고마는 세상에 수긍하여, ‘우리’ 안에 있을 때만 안심할 수 있는 ‘나’로 넘쳐나는 세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흡수되는 ‘나’는 결국 내가 아닌 ‘우리’일 뿐이다. ‘나’라고 믿고 있는 내가 있을 뿐이지 실상은 그저 언제나 ‘우리 안의 나’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생각해보니 우리들 모두에게 ‘우리’라는 ‘우리(울타리)’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나’로 거듭나기를, 참으로 괴팍하게 당부하는 소설이다.



호시노 도모유키 / 서혜영 역 / 오레오레 (俺俺) / 은행나무 / 317쪽 / 201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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