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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그는 떠났어도 여전히 건재한 우리 사회 폭력의 근원지...

by 우주에부는바람

*2012년 8월 20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쾰른의 선인’이라고 불리우는 독일의 소설가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는 동안 전혀 즐겁지 않았다. 카타리나 블룸과 마찬가지로 국가권력과 언론에 의해 명예를 잃은 (그로 인해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하였던) 우리의 대통령이 떠올랐기 때문이며, 그 이후에도 여전히 갖은 폭력을 발생시키며 대한민국의 비상식적 현재라는 결과를 내고 있는 국가권력과 일부 언론의 행태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인리히 뵐은 책의 후기를 통하여 이 책이 소설이 아니라 이야기로 불려지기를 강력히 원하고 있다. 그는 한걸음 나아가 이 이야기가 일종의 팜플릿일지언정 소설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작가는 이것이 현실과 유리된 소설로 읽히는대신, 우리들 주변에 산재한 실재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충분히 성공하였다. 사십여년 전 독일의 이야기를 통하여 최근의 대한민국을 떠올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괜스레 ‘쾰른의 선인’이라는 별칭이 따라 붙는 것이 아니다)

“... 어느 젊은 여자가 즐거운 기분으로 쾌활하게 전혀 위험하지 않은 댄스파티에 갔었는데, 나흘 후에 그녀는 - 여기서는 선고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고만 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의 보고에 그쳐야 한다 - 살인자가 된다. 사실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신문 보도 때문이었다...” (p.136)

이야기는 쇼킹하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복잡하지는 않다. 스물 일곱의 아리따운 가정부 카타리나 블룸은 친한 부인의 댄스 파티에 갔다가 괴텐이라는 남자를 만난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괴텐과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되는데, 다음 날 그를 예의주시하던 경찰들이 그녀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괴텐은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이제 사라진 괴텐 대신 블룸이 경찰서에 연행되고 취조를 받게 된다.

하지만 사리진 괴텐과 카타리나 블룸 사이의 연관성을 찾으려는 경찰과 검찰이 노력을 기울임에도 그 성과는 신통치 않고 카타리나 블룸이 며칠 고생하는 것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이야기는 한 언론사 기자가 근거 없는 루머를 확실시하며 써내기 시작하는 기사들에 의하여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괴텐이 사라진 날로부터 나흘이 지나 블룸은 기자인 퇴트게스를 살해함으로써 자신에게 드리워진 일련의 폭력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일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배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른다...” (p.104)

(다시 한 번 후기를 살펴보자면) 하인리히 뵐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제목과 부제와 모토를 모두 살펴볼 것을 권한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그야말로 겉으로 드러난 사실을 축약한 제목일 수 있다. 여기에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에 이르면 이 단순해 보이는 사건의 배후에는 도청을 비롯해 각종 불법이 묵인되는 국가 권력의 행태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이야기 속에서 폭력의 절정을 이루는 것은 《차이퉁》지라고 일컬어지는 언론 혹은 언론인에 의해서이다. 괴텐과 연관된 여성 카타리나 블룸이 등장하자마자 기자는 카타리나 블룸의 죽은 아버지와 병원에 있는 어머니, 그리고 그 주변 인물을 샅샅이 훑어가며 그녀를 곤경에 빠뜨리며 기자 자신 그리고 그 신문사가 원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의 소스를 제공하는 것은 그녀를 심문하는 국가 권력이고 말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성실과 긍지’를 지니고 있던 처녀 카타리나 블룸을 살인자로 바꿔 놓았다. (너무나 닮아 있지 않는가, 우리의 대통령에게 가해진 폭력과 말이다. 우리 쪽의 결과가 더욱 절망적이고 슬픈 것이었다는 사실만 빼고는...)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그렇게 책의 맨 앞장에 실린, 하인리히 뵐이 밝힌 ‘모토’에 대한 이해는 이야기를 모두 읽은 뒤에 더욱 확연해진다. 작가는 조선일보에 (그 보수 우익의 성향에) 선데이 서울이 (가지는 선정성만을) 합쳐진 듯한 황색지인, 아직도 독일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일간지인 《빌트》지를 직접적으로 겨냥한다. 일부러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야기 속의 폭력성을 따라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빌트》지를 떠올리게 된다는 말로써, 괜히 에둘러 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는 직접적인 모토이다. 또한 이야기를 함에 있어 자신이 직접 채집한 사실들을 통하여 재구성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빌트》지 퇴트게스 기자의 선별적이고 악의적인 취재 행태와 그 왜곡의 결과물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의 대통령이 떠올라 울컥하려는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는 떠났지만 대한민국의 《빌트》지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방식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때마침 오늘 여권의 대선 후보가 선출되었다. 한국의 《빌트》지들의 지원을 받는 인물이다. 그리고 곧 야권의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이 시작될 것이다. 아마도 한국의 《빌트》지들은 자신의 먹잇감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 속 카타리나 블룸이 어느 저녁 댄스 파티에 갔다가 우연히 사랑에 빠진 것과 같은 우연한 상황이 만들어지기를 학수고대 할 것이다. 슬프게도 그는 떠났고 더욱 슬프게도 우리 사회 폭력의 근원은 여전히 건재하다.


하인리히 뵐 / 김연수 역 /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 Oder Wie Gewalt Entstehen Und Wohin Sie Führen Kann) / 170쪽 / 2008 (197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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