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드로 베로네시 《조용한 혼돈》

고통의 부재에 대항하는 이 남자의 방식에 조응하다...

by 우주에부는바람

“내 이름은 피레트로 팔라다니. 마흔세 살, 홀아비다. 사실 법적으로 따지자면 마지막 말은 틀리다. 왜냐하면 라라와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난 지 12년이 되었고 11년을 함께 살았다. 그러는 동안 딸을 하나 낳아서 지금 열한 살이다. 우리는 곧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었다... 그래서 집에는 벌써 곳곳에서 선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라라가 죽었다...” (p.29)


라라는 별장에서 딸과 함께 있었고, 그 시간 피레트로 팔라다니는 해변에서 물에 빠진 여자를 구하는 중이었다. 그 구조는 위태로웠지만 성공해서 여자는 살아났다. 하지만 그 공은 엉뚱한 사람에게 돌아갔고 그는 허탈감과 분노와 짜증 속에서 별장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별장에는 아내가 죽어 있었고, 그 장면을 본 것은 딸이었다. 만약 그가 해변에서 다른 사람을 구조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면 (구조에 대해 치사를 받지도 못할 것이면서) 그는 아내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더라도) 딸에게만 맡겨 놓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마땅히 치러졌어야 할 결혼식 대신 장례식을 마치고 이제 그는 딸을 등교시킨다. 그리고 나서 당연히 이행해야 할 회사로의 출근이라는 노선 대신 자신의 아우디 A6 차량에서 머문다. 그는 딸에게 네가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리겠다, 라고 말하였고 그는 그 말대로 할 직정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이를 데리러 오는 학부모들로 학교 앞이 일련의 혼란, (그가 느끼기에) ‘조용한 혼돈’으로 술렁일 때까지 학교 앞을 지킨다. 그 ‘조용한 혼돈’은 또한 모든 사람들이, 그가 ‘빠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직 오지도 않은 그 고통으로부터 끊임없이 구해내려고 애쓰는 상황’을 닮아 있기도 하다.


“... 이게 바로 기적이 아닌가. 나는 별로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아내가 죽었지만 나는 괴롭지 않다.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렇다. 나는 괴롭지도 않고 죄책감도 없다.” (pp.81~82)


그 첫날의 머뭄 이후 피에트로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는다. 거대한 방송국의 국장인 그의 회사는 현재 외국계 회사로의 인수합병이라는 방송국보다 더 거대한 일을 앞두고 있는 상태다. 그는 그러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 그래서 자신의 직속 상사인 장 클로드가 방문하였을 때 자신의 의사를 밝힌다. 딸의 학교 앞, 자신의 차에서 업무를 볼 것이며, 회사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그러자 이제 사람들이 학교 앞의 그를 찾아오기 시작한다. 이런저런 업무를 위하여 그의 비서인 안나리사가 오고, 장 클로드의 정적이 된 또 다른 상사 티에리도 오고, 또다른 그의 직장 동료인 에녹 등이 찾아왔다. 처제인 마르타는 자신의 임신 소식을 학교 앞으로 찾아와 알리고, 동생 카를로도 학교 앞 벤치로 찾아와야 나와 언쟁을 벌일 수 있다. 그런가하면 강아지를 끌고 다니는 아가씨 욜란다와 경찰, 나를 선생이라고 부르는 노인과는 새로운 접점을 찾게 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학교 앞, 그의 차와 벤치와 바 등에서 이루어진다.


“... 제가 학교 앞에서 하루 종일 있어도 어느 한 사람 미친놈이라고 단정 짓지 않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제가 지금 괴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게 그들 인생에는 오히려 위로가 되며, 그것이 아마도 그들을 안심시키는 이상하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만나러 와서는 괴로움에 맞설 용기와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를 찾아 돌아가며,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일을 제게 털어놓아서 그 짐을 저에게 옮기고, 비밀스러운 이야기와 일의 진행 상태 등을 제게 맡겨 단 한 순간이라도 자유로워지기 원하지요. 그들이 보기에 고통스러운 제가 선택한 이 장소에 오면 이상하게도 모두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pp.263~264)


피에트로는 그렇게 세 개의 계절이 흐르는 동안 그곳에서 지낸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이용한 항공사나 자신이 사귄 여성의 리스트를 작성하기도 하였고, 식사에 초대되기도 하였으며, 회사 합병의 당사자인 유대계 캐나다인 슈타이너와 카톨릭 교도 프랑스인 뵈송과도 만났다. 그리고 아내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 자신이 구한 여인 엘레오노라 시몬치니의 방문도 받았다.


아내의 죽음 이후 남겨진 어린 딸의 담담함에 더하여 자신이 예상하였던 극심한 공포가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느끼게 된 혼란스러움이 원인이 된 그의 행동을 (소설 속의 많은 인물들도 그러하듯) 쉽게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 혼란스러운 와중의 담담함에는 분명 슬픔이라는 정조가 짙게 배어 있다. 울음을 터뜨리지도 않고 머리를 쥐어 뜯지도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애달프다. 그 애달픔의 정조는 소설의 마지막, 아버지의 머물러 있음과 관련한 자신의 학교 내에서의 상황을 전달하는 딸의 말에서 극대화됨과 동시에 해소되어 버린다.


사두고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 읽었는데, 미리 읽었어야 옳았다, 라는 생각이 들만큼 좋았다. 삶과 죽음과 가족과 사회라는 우리 주변의 모든 카테고리들이 범람하지 않으면서도 모두 스며들어 있는 소설이다. 사소한 이야기와 거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가족의 죽음과 회사의 합병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크게 거슬리지 않고 이렇게 맞물려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 동명의 영화가 나와 있는데 (난니 모렌티가 바로 피에트로를 연기하였다) 가능하다면 찾아서 볼 생각이다.



산드로 베로네시 / 천지은 역 / 조용한 혼돈 (Caos Calmo) / 열린책들 / 494쪽 / 2011 (2005)



ps1. 책을 읽는 중에 누군가를 만났고, 그에게 스토리를 잠시 언급했다. 그러자 그는 피에트로를 이해할 수 있다며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의 상황을 말해주었다. 그 또한 장례식이 끝나고 두 달이 지날 때까지 어떤 극심한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두 달여의 시간이 지나고 그저 다른 날처럼 똑같이 출근을 하는 버스 안에서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고 하였다. 출근 시간이었고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버스였지만 통제가 가능한 울음이 아니었다고 한다.


ps2. 소설을 읽다가 문득, 내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그러니까 아내가 갑자기 죽음을 당한 이후 나는 회사에 출근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 묻게 되었다. 가까운 이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어야 하는 일상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든 두 가지 상황을 그러니까 (비록 회사에 직접 출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내의 죽음과 회사의 업무를 동시에 대면하는 피에트로가 대견해 보이기도 하였다. 물론 그에게는 클라우디아라는 딸이 있었다.


ps3. 책은 모두 38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 34장의 짧은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피에트로가 자신이 구해준 여인인 엘레오노라 시몬치니에게 해주고 싶었지만 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사실 피에트로는 자신의 별장에서, 잠들어 있는 딸이 다른 방에 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구해준 여인 엘레오노라 시몬치니와 섹스를 하였다.) 어떤 이야기인지는 덧붙이지 않겠다. 서점에 들러서 이 책 <조용한 혼돈>을 잠시 들춰보게 된다면, 마침 세 페이지 정도의 짧은 글을 시간이 된다면, 그저 담담하게 읽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405쪽부터 세 페이지만 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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