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브 플로베르 외 《애서광 이야기》

이 지독한 수집광들을 가로막을 수 있는 장벽은 없으니...

by 우주에부는바람

‘수서가 蒐書家는 독자도 아니고 작가도 아닌 문학의 양성체이다’ 1928년 12월 한 초판 클럽의 만찬회 석상에서 샨 레슬리라는 인물이 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애서광인 실제 인물은 꽤 많다. 우연찮게 직전 릭 케코스키의 책을 읽었는데, 그 안에서 흔하디 흔한 것이 ‘수서가는 그가 산 책을 읽지 않는다’ (팔리어) 라는 신조를 지키는 듯한 애서광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책을 모으는 데는 끝도 없는 욕망을 갖고 있다. 프랑스의 언어학자로 평판이 높았던 블러르는 집을 나설 때 1미터 짜리 지팡이를 늘 들고 다녔는데, 그 높이의 책을 손에 넣기 전에는 늘 불안해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 소설집은 독서가가 아닌 책을 모으는 수집가를 테마로 하는 세 편의 소설을 품고 있다. 사실 나는 애서광이 아니라 애독서광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슈테판 츠바이크와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이 포함된 이번 책을 읽었다. (독서광에 대한 이야기는 수집광에 대한 이야기에 비해 흔하지 않다) 소설에서 발견한 애독서광으로는 김하기의 <항로 없는 비행>에 나오는 주인공을 들 수 있겠다. 대학생인 그는 책을 읽으며 길을 걷는데, 어느 순간 조금 이상함을 느낀다. 그는 높이가 다른 인도와 차도에 걸쳐 기우뚱하게 걸으면서도 책 읽기를 멈추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내 기억 속 그를 능가하는 애독서광을 꾸준히 생각하다가 길을 걷는 순간이나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책을 읽기 위하여 점자를 배운 그녀를 떠올렸고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서는 중이다. 이 소설집을 읽는 것 또한 그녀와 가까워지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었다.


옥타브 유잔느의 「시지스몬의 유산」.

애서가 시지스몬과 그의 경쟁자였던 또 다른 애서가 규마르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시지스몬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다. 경쟁자의 죽음에 득의양양 하였던 규마르는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시지스몬은 죽었지만 희귀본으로 가득한 그의 서가는 그 누구에게도 팔릴 수 없도록 이미 조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봉쇄를 뚫기 위해서는 책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가득한 에레오노르라는 괴물 같은 유산 상속자를 거쳐야 했다. 그리고 결국 규마르는 서가를 손에 넣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49세인 자신보다 열 살 가까이 더 먹은 추녀인 에레오노르와 서가를 둘러싼 전쟁을 치르면서 결국 그로부터 5년 후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드디어 서가를 손에 넣고 그 서가의 문을 열었을 때 규마르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에레오노르가 풀어 놓은 좀벌레에게 완전히 파먹혀버린 책들의 무덤 뿐이다.


구스타브 플로베르의「애서광 이야기」.

플로베르가 15살에 썼다는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갸코모라고 하는 헌책방 주인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재력에서 그를 압도하는 경쟁자인 바프테스트가 있다. 그 날도 갸코모는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책을 경매에서 바프테스트에게 빼앗긴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바프테스트의 집에 불이 나고, 갸코모는 그의 집에서 그 책, 세상에 하나 뿐인 성 미카엘의 《비전》을 꺼낸다. 하지만 결국 갸코모는 바프테스트의 살인자로 몰리고 재판을 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재판에서 갸코모는 사형을 언도 받는데, 갸코모를 사형 언도 보다 더욱 낙담시킨 것은 바로, 세상에 하나 뿐인 줄 알았던 그 책이 사실은 한 권 더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스페인에 아니 이 세계에 단 한 권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내 책이 또 있다면 내게는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에요. 그러한 일은 생각만 해도 견딜 수 없어요. 그건 거짓말이에요. 그 책이 또 있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p.111)


슈테판 츠바이크의 「보이지 않는 수집품」.

내가 좋아하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이 실려 있다. 수집광과 관련하여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소설은 애서광 이야기가 아니라 그림 수집가 이야기이다) 37년간 베를린에서 골동품 상인으로 일했던 주인공은 자신의 상점과 거래를 하였던 사람들의 목록을 살피다가 한 퇴역군인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의 집주소를 들고 한 시골 지방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찾아간 그곳에서 80세의 그가 아직 살아 있음을 확인한 골동품상은 기쁨에 젖어들지만 곧이어 장님인 주인공과 이상한 제스처로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그의 아내를 통하여 뭔가 이상한 상황임을 직감한다. 사실인즉슨 전쟁에서 패하여 피폐한 독일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이 퇴역군인의 아내와 딸은 그가 평생에 걸쳐 모은 콜렉션들을 이미 팔아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 값나가는 물건들을 팔았음에도 그들은 구질구질한 생활로부터는 전혀 벗어날 수도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는 그들이 받은 돈을 곧 휴지조각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아내는 어떤 일이 있어도 콜렉션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한 그 남편을 감쪽같이 속여 왔으니, 그 남편이 오늘 골동품상에게 자신의 콜렉션을 자랑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마치 티비에서 간혹 틀어주는 컷수가 현저히 딸리는 미담 애니의 한 장면이 펼쳐진다. 빈 종이가 대신하고 있는 유명 작가들의 컬렉션을 앞에 두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작품을 설명하는 눈먼 퇴역군인, 그것에 추임새를 넣으며 쓸쓸해 하는 골동품상, 그리고 이들 두 사람을 앞에두고 조마조마해 하는 아내와 딸이라는 조합의 그림이 말이다.



구스타브 플로베르 외 (옥타브 유잔느, 스테판 츠바이크) / 이민정 역 / 애서광 이야기 (시지스몬의 유산, 보이지 않는 수집품) / 범우사 / 146쪽 / 애서광 이야기 1836 (시지스몬의 유산 1895, 보이지 않는 수집품 192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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