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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할머니에게서 아버지에게로, 아버지에게서 내게로...

  나의 할머니의 이름은 김판례이다. 1990년도에 돌아가셨는데, 당시 90세 혹은 91세였다. 할머니의 주민등록증을 본 적이 있는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할머니는 세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었다. 할아버지는 이들 중 막내인 나의 아버지가 아홉 살일 때 돌아가셨다. 세 명의 아들 중 둘째 아들을 전쟁통에 잃었고, 맏이인 첫째 아들은 정신지체의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감정의 폭이 믿을 수 없이 작았다. 웃거나 시무룩하거나, 그 사이 어디쯤이었다. 소리 내서 깔깔 웃거나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는 할머니의 모습은 거의 상상할 수가 없다. 할머니와 함께한 20년 동안 거의 똑같은 얼굴만 보고 산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심리학이나 교육학 전문가가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은 양육받아본 경험과, 상대적으로 풍부하게 남은 어린 시절의 기억들뿐이다. 나는 내가 겪은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 경험자로서 말하건대, 할머니처럼 감정 표현이 단순하고 작았던 것은 매우 좋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절대적으로 좋게 작용했다.” (pp.187~188)


  내가 아는 할머니는 구순물 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시집을 온 아낙들은 자신이 살던 동네 이름 뒤에 ‘댁’을 붙여 불렀는데, 전라(북)도에서는 이 ‘댁’을 사투리로 ‘떡’이라고 발음하였다. 하지만 ‘구순물’도 사투리 발음이었으므로 ‘구순물’이 어디를 지칭하는지 지금은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작은 동네에 낯선 아이가 등장하면 눈여겨 보았던 마을 어르신들이, 혼자 동네 어귀를 걷는 나를 향해 ‘니가 구순물 떡 손자냐?’ 라고 묻곤 하였다.  


  “무신론자의 세계는 공허하지도 냉정하지도 않다. 인생의 앞과 뒤에 그 어떤 다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겨우 100년 어름의 시간도 충분히 의미 있고 아름답고 사랑할 만하다. 생의 과정과 결과에 신의 포상이나 처벌이 따르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선하게 살아가려 애쓴다. 포상이 따르지 않는 노력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것이 아닌가? 할머니 같은 사람들의 그 목적 없는 의지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나는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진다.

  죽은 다음에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이, 할머니가 물려준 그 아름다운 세계관에서 유일하게 슬퍼지는 부분이다.” (p.98)


  할머니가 살았던 동네, 나의 아버지가 태어난 곳은 전북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 425번지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본적을 적어야 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인지 저하를 겪고 있는 아버지에게 이 주소를 불러드렸더니 크게 놀라셨다. 너는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냐? 나는 이제 맹추가 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라고 하셨다. 슬픈 표정의 아버지를 투석 병원으로 실어 나르는 중의 일이다.


  “이전에 살았던 세계는 학교, 직장, 문화, 친구, 성취와 우정의 세계였다. 모두 두 글자 이상이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세계는 쉬, 똥, 침, 코, 토, 잠, 젖, 신기하도록 모두 한 글자였다. 아마 생명과 양육 활동이 그토록 근원적인 것임을 언어로서도 상징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한다...” (p.34)


  아버지의 인지 저하를 정확히 확인하러 들른 병원의 대기실에서 엄마와 이런 대화를 나눈 것도 기억이 난다. 두 동생은 애들을 낳아 키우느라 애를 썼잖아요. 저는 애가 없는 대신 어려진 아버지를 돌보는 것으로 하지요, 뭐. 아버지의 향후를 걱정하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었다. 그로부터 여섯 달이 조금 더 흘렀다. 이미 흘려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데, 나는 생각한 것보다 (아니 생각할 수 없었으므로) 더 힘겨워하고 있다. 


  “... 나를 기른 것은 활동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엄마였지만 정물이나 소품 같았던 할머니는 양육의 대가답게 최소한의 언어와 행동만으로도 만만찮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내가 자란 집에서는 두 명의 강력한 양육자가 전달하는 상반된 메시지가 두 개의 사랑으로 20년간 평행우주처럼 나란히 흘렀다. 나는 유별나게 발달된 유년 기억으로 분열적이고 모순적인 두 가지 사랑의 기억들을 차곡차곡 저장했다. 그리고 중년의 위기와 양육의 고비가 함께 닥친 어느 날부터 그 오래된 기억들을 꺼내 하나하나 먼지를 털고 그 사랑들이 나에게 끼친 장기적인 영향과 의미를 되새기기 시작했다...” (pp.64~65)


  투석 병원을 오가는 중에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읽고 떠올린 할머니에 대한 기억 몇 가지를 아버지에게 들려 드렸다. 아버지는 자신은 너만큼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우셨다. 제가 기억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말씀 드렸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얼마 전 투석을 끝낸 아버지의 얼굴에서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깜짝 놀랐다. 나는 쿠싱 증후군으로 얼굴에 살이 오른 다음부터 얼굴이 아버지와 판박이라는 말을 듣고 있기도 하다. 


심윤경 /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 사계절 / 223쪽 /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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