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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애리 《그리고 일기가 남았다》

어느 날 마지막 일기를 쓰고, 이것으로 되었다 만족할 수 있다면...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십이 월이 되면 DIARY 그리고 뒤이은 네 자리의 연도를 이름으로 삼은 파일을 더 자주 열게 된다. 90년도 중반 이후부터 연도만 바뀌는 파일을 만드는 것으로 한 해를 시작하고 있다. 올해의 파일에는 이미 읽은 책으로부터 발췌한 문장들이, 인상 깊었던 영화로부터 채집한 대사들이 남아 있다. 해가 바뀌기 전에 이것들을 한 페이지짜리 리뷰로 얼른 정리해야 하는데, 안달복달하는 것이 나의 연례행사이다.


  “토요일 과외가 끝난 어제, 대전에 있는 맞배집으로 달려갔다. 친구들이 공연을 끝낸 후였다. 예람의 본가에서 <퀸스 갬빗>의 한 에피소드를 감상하고 나서 우리는 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에 들었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에 나오는 ‘성’은 예람의 노래 <성>처럼 性과 城 모두를 말한다. 대화에 재미있는 변주가 일었다.” (p.39)


  지금은 책을 읽고 정리하는 것이 일기 파일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과거의 일기 파일은 조금 달랐다. 애리, 라는 뮤지션이 쓴 《그리고 일기가 남았다》에 실린 것들처럼 좀더 일상의 상황들 혹은 일상과 보다 거리를 둔 문장들이 파일을 채우고는 했다. 여러 경로를 통해 만나는 다종다양의 사람들이 (나중에는 나조차 매칭을 시키지 못하게) 암호화된 이니셜로 등장하고는 하였다. 


  “안개는 맛있다 / 고 불확실함을 사랑한 사람이 말하고 있다 // 안갯속에서 뭐가 보여요? 라고 한다면 보이지 않아 다 보인다고 말할 것이다 수천 년 전 보지 않고도 모든 것을 내다보았던 사람 속에 내가 있다 // 체리는 맛없다고 생각했어 / 라고 말한 사람들이 많았다 // 튼튼하고 조그마한 과즙을 베어 물었을 때 씨앗을 내뱉을 때 씨앗을 버릴 때 자유로워질 때 맛을 느낄 때 취향이란 말의 처음에 내가 있다” (p.66, <안개는 맛있다>)


  실은 까페 여름의 선배(혹은 후배)가 손님을 응대하는 동안, 까페에서 판매용으로 비치하고 있는, 일종의 독립 출판물이랄 수 있는 《그리고 일기가 남았다》를 드문드문 읽었다. 담담하게 자신의 상황을 피력하고, 소소한 관계들을 기록한 일기집이었다. 짬짬이 서서 읽는 동안 옛 시절이 떠올라 저절로 작은 미소가 생기곤 하였다. 결국 얼마 전 의아해하는 후배에게 책의 결제를 요청하였다.


  “나는 내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고, 남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도 좋아한다. 드러냄과 엿보기를 동시에 좋아하는 셈이다. 이야기뿐만이 아니다. 아주 어릴 적, 집에 놀러 온 친구들에게 여러 사진첩을 통째로 꺼내 계속 보여주었다. 남의 집에 가서도 사진첩 보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은 인스타그램에서 할 수 있게 된 것을 그때도 좋아했다. 드러냄과 엿보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비슷하고도 다른 인간들을 보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다.” (p.131)


  나의 젊은 시절을 복기하게 되는 몇몇 지점 이외에 저자의 생활 반경이 지금의 나와 겹치는 것도 읽는 재미로 추가되었다. 오랜 기간 서울의 동남쪽에 거주하다 서울의 서북쪽인 지금의 이곳으로 옮겨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낯섦이 익숙함으로 온전히 바뀐 상태는 아니다. 저자가 거니는 홍제천이나 저자가 들르는 보틀라운지 혹은 카페 여름이 지금 내가 맴도는 궤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반가왔다.


  “... 앞으로도 일기를 쓰고 싶다. 일기를 쓰면서 살아간다는 감각을 얻었다. 음악가로서 공연을 시작하고 약 오 년 동안은 음악 활동만이 거의 유일하게 내가 살아간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줬다. 그렇다고 요즘 일기만이 그런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건 아니다. 음식, 비교적 규칙적인 생활 루틴에서 오는 안정감, 하우스메이트 이영의 고양이 묘묘, 친구들, 가족 등 여러 가지 것에서 내가 살아간다는 감각을 얻는다. 이중에 최근 가장 새로웠던 게 일기였다.” (p.169)


  과거와는 달리 이제 나의 일기 파일은 책이나 영화 리뷰라는 형태로 꽤 단촐해졌다. (저자가 그런 것처럼) 앨범 제작기를 쓰려다 실패하여 당도하게 된 일기집, 같은 형태가 될 가능성은 없다. 그저 지금의 이러한 쓰기가 완전히 끝이 나는 일이 없도록, 어떻게든 명맥이 유지되도록 애를 쓸 뿐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마지막 일기를 쓰고, 많은 것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이것으로 되었다, 라고 만족해할 것이다. 



애리 / 그리고 일기가 남았다 / 173쪽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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