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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Jul 30. 2024

장일호 《슬픔의 방문》

자꾸 잊혀져가는 희망의 가능성을 어떻게든 포개어보고 싶은...

  저자인 장일호는 〈시사IN〉의 기자이다. 한때 〈말〉지와 〈한겨레21〉을 정기적으로 읽은 적이 있지만 어느 시점 이후 시사지는 더 이상 읽지 못하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 속도가 주(혹은 월)단위로 읽기엔 너무 빨라져서, 라고 읽지 않음의 이유를 대고 싶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체감의 속도일 뿐 실제로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디게 움직이고 있다. 그보다는 세상의 진행 방향에 대하여 갖게 되는 드문 희망과 잦은 절망이 그 읽지 않음의 이유로 더 적합하겠다.  


  “서글픔과 미안함이 ‘기어이’ 다정과 평화를 닮아 가는 일은 타인과 세상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통과하는 동안 이뤄지는 것이다. 모르겠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알고 싶다’는 마음이 될 때 우리는 연결된다. 우리를 그렇게 연결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꽤 자주 활자라서 나는 계속 언론사에서 일하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저널리즘이라니 우리끼리만 아는 ‘나쁜 농담’ 같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속절없이 그런 것에 마음을 홀리곤 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 힘을 믿고 싶다.” (pp.165~166)


  저자의 이름을 처음 접하였을 때는 남자인 줄 알았는데 내용에서 금세 여성이라는 사실이 파악된다. 다만 그 문체에 가만히 적응을 하고 있다보면 중성적이라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 나쁘다거나 어중건하다거나 어색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카테고리로도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유별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뉘앙스와 패턴을 분명히 하고 있어 본받을만 하다.


  “책에서 취한 살과 뼈에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마음대로 이어 붙였다. ‘읽기’는 자주 ‘일기’가 되었다. 밑줄을 따라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나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들고 책 앞에 서곤 했다. 삶도, 세계도, 타인도, 나 자신조차도 책에 포개어 읽었다. 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슬픔의 얼굴은 구체적이었다...” (p.9)


  자기 자신을 책에 포개어 읽고, 또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읽기’와 ‘일기’를 결합시키는 방식도 무척이나 훌륭하다. (책에 실린 글들이 본래 주간지에 실렸던 것들이라면 나는 이 글들을 읽기 위해서라도 그 주간지를 사볼 요량이 있다) 저자가 겪은 유년의 가난과 최근의 투병이라는 커다란 슬픔들이 어떻게 책과 함께 포개어지고, 어떻게 발화되고 있는지를 보는 일에는 슬픈 쾌감이 있다.


  『대런 맥가비는 《가난 사파리》에서 독자에게 한 가지 태도를 제안한다. “나는 우리가 먼저 정직해지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혁명은 없을 것이다. 우리 평생에는 없을 것이다. 이 체제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나갈 것이고 우리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한때 바랐듯이 정치권력이나 체제가 바뀌기를 ‘순진하게’ 기대했다. 이제는 그저 일정 부분 망가진 울퉁불퉁한 길을 일단 걸어가 본다. 내면의 힘을 발견하고 기르는 편에 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려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힘은 누군가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빈곤은 이런 방식으로 산업 화되었다) 나에게도 있다는 걸, ‘가난한’ 우리도 이 세계의 일부이고 책임 있는 구성원이자 시민이라는 걸 믿으면서.』(pp.75~76)


  오래전 주간지를 끊은 것처럼 현재는 모든 뉴스를 끊고 있다. 그 절단의 틈새를 뚫고 들어오는 뉴스들조차 어찌할 수는 없지만 특히나 사회정치와 관련된 소식에 일부러 귀 기울이지는 않는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투정보다는 그래 봐야 별 수 없구나 하는 낙담이 부채질한 결과였는데, ‘이제는 그저 일정 부분 망가진 울퉁불퉁한 길을 일단 걸어가 본다.’라는 문장을 보고 있자니...


  “나도 한때는 사람 돌보는 거나 동물 돌보는 거나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사람과 동물은 다르다. 사람을 키운다는 것은 미래지향적이다. 우리는 그 아이가 무언가가 되어 가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공부 잘 하는 사람, 재능이 뛰어난 사람, 돈 잘 버는 사람, 꼭 그런 게 아니라도 보통의 시민으로 제 몫을 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그렇기에 때론 다그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물은 그렇지 않다. 그저 내 곁에 있어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지금 이대로, 매일매일 똑같기를 기대한다는 점에서 동물을 돌본다는 것은 현재지향적이다.” (p.110, 김화수 《냥글냥글 책방》 재인용)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은 책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은데, 《슬픔의 방문》은 그렇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모두 각자의 이유에서 모두 다른 접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풀어내는 글도 좋고, 작가가 그 글을 풀어내는 원동력의 하나로 인용하고 있는 책들도 놓치고 싶지 않다. 저자를 응원하고 싶어지는 마음도 커지는데, 저자가 열어젖히고자 하는 가능성에 자꾸 잊혀져가는 내 희망을 포개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장일호 / 슬픔의 방문 / 낮은산 / 255쪽 /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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