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위기를 돌파하는 길은 이 사회의 위기에 대한 정면 대응으로부터..
*2012년 2월 5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지난 해 2011년 수상작인 공지영의 소설 <맨발로 글목을 돌다>에 이어 올해 수상작인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에서도 소설의 중심에 글을 쓰는 작가가 있다. 소설의 위기, 문학의 위기에 대한 논란은 이상문학상 수상작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 같다. 소설의 위기는 문학의 위기이기도 하고, 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의 위기이기도 하며, 인문학의 위기는 인류의 정신의 위기이기도 하니 자본이 득세하는 이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종말에 대한 논의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지만...) 이러한 이상문학상 수상작의 경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
김영하는 지난 해인 2011년 초 작가론 혹은 예술론에 대한 일련의 논쟁 끝에 트위터와 블로그와 같은 온라인 생활을 접고 글쓰기에만 전념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라는 결과물로 우리들 앞에 다시 돌아왔다. “... 막상 쓰기 시작하자 신비스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작가들이 어느 정도는 겪는 현상입니다만 작품이 작가 자신을 배반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번 경우에는 저 작품이 저 자신을 초월해, 저의 비천한 문재와 사상을 훌쩍 뛰어넘어 저 홀로 놀라운 지경으로 가버린 겁니다...” 자신을 옥수수라고 믿는 어느 정신병자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소설은 소설가인 내가 편집자인 전처와 전처의 출판사 사장에게 등 떠밀려 뉴욕으로 날아가고, 그곳에서 사장의 아내와 한 집에 기거하며 소설을 쓰는 이야기이다. 김영하 특유의 펄떡거리는 듯한 스토리 라인이 돋보이며, 그러한 뼈대에 튼실하게 붙어 있는 생선살의 맛도 훌륭하다. “... 이봐 너구리. 내가 등장인물일 뿐이라고? 무슨 소리! 나는 언제나 내 인생이라는 난해하고 음란하고 해체적인 책의 저자였어.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고 누구도 출판해주지 않을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지. 내가 종속변수라고?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내가 바로 저자이고 일인칭 시점 화자이고 이야기의 종결자야. 너나 네 마누라가 아니라 내가 죽어야 끝나는 거지. 그래야 마지막에 ‘끝’이라고 쓸 수 있는 거라고.” 작가와 사회의 관계 보다는 작가 자체 그리고 작품 자체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이는 김영하는 (나는 이런 김영하의 경향에 반대하지만) 자신의 그러한 경향을 소설로 완성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김영하의 경향에 반대하지만 자신의 그러한 경향을 소설가인 그가 이처럼 소설로 발언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찬성한다) 본다. 작가는 스스로 자신이 옥수수가 아님을 알고 있지만,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닭들은 그가 옥수수가 아님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작가가 아무리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고 혼잣말을 하여도...
김영하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
“... 새에게도 분명 그림자가 있다. 날아가는 새 떼를 보고 있노라면 가끔, 아주 가끔. 뭔가 검고 어두운 것이 휙 지나간다. 너무 찰나여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으면 잘 모르기 십상이다...” 소설가가 된 나, 신부가 된 바오로, 그리고 미경의 남편이 된 정식과 미경이... 시간은 흘렀고 그들은 어른이 되었으며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 남았다. ‘왠 새 그림자’가 휙 지나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어느 ‘달도 없는 밤’, 그리고 나는 우는 것이다.
함정임의 「저녁식사가 끝난 뒤」.
P선생이라는 연결고리로 만나게 된 이들이 오랜만에 순남씨와 남편 희복씨 집에서 저녁식사 자리를 갖는다. 소설은 그들을 맞이하기 위한 순남씨의 준비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P선생은 죽었고 그를 연결고리로 삼아 결혼을 했던 이들 중에는 이혼을 한 이들도 있다. 그들은 다시 모였고 그들은 P선생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을 이어주던 P선생이라는 연결고리가 아예 부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김경욱의 「스프레이」.
김경욱은 김경욱이어서 소설의 스토리가 영화처럼 선명하다. 어느 날 잘못 가져온 택배 상자, 그리고 옆집 고양이로 인한 불면의 밤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는 어디서 보거나 듣거나 읽은 적이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뒤이어 우체부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지난 해 어느 날 신문을 장식하였던 우체부의 죽음과 관련한 뉴스가 떠오르게 된다. 잘못 가져온 택배 상자 안의 스프레이라는 작은 소품으로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건의 연속이 흥미롭다.
하성란의 「오후, 가로지르다」.
“... ‘큐브 농장’이라고 불리는 비좁은 칸막이 안에서 일하는 우리가 과연 닭을 동정할 만한 처지에 있기는 한 건가. 하지만 우리가 가장 두려운 건 동시에 사무실의 모든 큐비틀이 사라지는 것이다. 큐비틀이 모두 사라지고 마주치는 서로의 얼굴들이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노동, 그 노동에 갇혀 지내는 현대인들에 대한 우화라고 보아야 할까...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의지 사이에서 평생 맴도는 듯한 우리들의 노동의 정체는 출입할 수 있는 한 면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삼면을 큐비틀 칸막이로 막아 놓은 노동 현장 자체가 고스란히 말하고 있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김숨의 「국수」.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을 읽어보자니 아마도 김영하의 수상작과 함께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으로 보인다. 읽어보면 이상문학상이 좋아하는 스타일임을 알 수 있다. 자식을 낳지 못하여 쫓겨나서, 어린 주인공 남매들을 거둬주기 위해 들어왔던 새엄마, 그녀가 해준 첫 번째 음식이었던 아무런 간도 되어 있지 않은 반죽인 채로의 국수... 그리고 이제 나는 그 새엄마의 주방에서 오래전 새엄마가 해줬던 국수를 재현하고 있다.
조해진의 「유리」.
괴롭힘을 당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적은 충격만으로도 깨뜨릴 수 있을 것 같은 유리와 같은 상황이었지만 그러한 충격을 제공해주는 이들은 그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바빴고, 선생님은 관심 갖지 않았다. 이제 성인이 되었고 한유리 강사가 된 지금, 나는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 과거의 그 유리로 만들어진 공간을 다시 찾는다. 그리고 벽돌을 집어 들었다.
최제훈의 「미루의 초상화」.
최제훈은 이야기를 다루는 데 능숙한 작가이다. 그의 이러한 장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단편이다. 대학로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노인, 그 노인에게 술을 사주면서 듣게 되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자신이 만났던 미루라는 여자, 그리고 젊은 시절 그 여자와 보냈던 시간과 바오밥 나무를 향하였던 여행, 그리고 여행지에 떨구고 온 여자와 다시 노인을 찾아온 여자, 그리고 이제 노인이 그리는 모든 초상화에는 그 여자 미루의 얼굴이 스며들어 있다.
조현의 「그 순간 너와 나는」.
시골에서 서울 하고도 왕십리로 전학을 온 나, 그리고 나와 함께 어울리던 4인방의 이야기이자 무당의 딸이었던 미설이의 이야기이다. 4인방과 함께 (무당의 딸이었음에도) 여름성경학교를 다녔던 미설이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었고, 나는 미설이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어린 관계는 곧 파탄이 났고 이제 딸을 잃은 나는 민혁의 장례식장에 가서, 미설이의 예언을 확인하려는 참이다...
다른 때에 비하여 이야기의 흐름이 분명해 보이는 작품들이 많다. 다만 사회적인 흐름을 반영하는 -그러니까 요 몇 년 사이에 급격하게 악화된 표현의 자유 등과 관련하여 문학하는 자들로서 이렇게 아무런 발언이 없을 수 있는가 - 작품들이 없다는 점은 아쉬움을 넘어 흥미롭기까지 하다. 소설의 위기, 문학의 위기라는 외침이 어째서 공염불이 되고 있는지를 우리의 소설가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아닐까. 사회의 거대한 삐걱임 혹은 소소한 외침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외면하는 제스처를 보이면서, 그러한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러한 소리를 소설로 끌어들이지 않으면서, 왜 소설을 읽지 않고 문학을 소비하지 않느냐고 말할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김영하 (함정임, 김경욱, 하성란, 김숨, 조해진, 최제훈, 조현) / 2012 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 / 383쪽 / 2012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