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없이 난무하는, 서사가 사라진 이야기들 사이에서 길을 잃기 십상인.
원래 이 작가, 이렇게 수다스러웠던가... 작가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이미지와 달라서 조금 낯설어졌다. 나는 이 작가가 어딘가 수더분하면서도 정갈하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 소설집의 작품들은 수다스럽고 난삽하다. 서사에 크게 기대지 않고 통통 튀는 공처럼 튕겨져 나오는 이야기들을 받아들이기에 지금의 내 상태가 조금 지쳐 있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여하튼...
「어쩌면」.
2008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려 있던 작품이다. 당시 나는 “죽어버린 그들이 풀어내는 살아있는 우리들을 향한 넋두리... 살아서는 할 수 없었지만 죽음으로 인하여 가능해진 일들, 혹은 살아서는 알지 못하였지만 죽음으로 인하여 알 수 있게 되는 일들, 또는 살아서는 절대 만날 수 없었지만 죽음으로 인하여 만날 수 있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 라고 적었다. 다시 읽은 느낌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매일매일 초승달」.
2010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려 있던 작품이다. “어린 셋째를 남겨 두고 집을 나간 첫째와 둘째... 그리고 이들은 성인이 되어 다시금 만나게 되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세 자매의 사이좋은 소매치기 행각... 그리고 이들 자매의 탄생 그 이전에 등장하는 초승달의 흔적...” 이라고 적혀 있다. 나이 먹고 늙어 관절염에 걸린 세 자매 소매치기 일당, 이라는 설정은 여전히 재미있다.
「웃는 동안」.
표제작이다. “... 가을도 거의 지났는데 웬 잠자리지... 혹시 녀석이 온 건가? ... 나비로 환생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자자리로 변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봐... 그때 바람이 불었고, 잠자리가 날아갔다. 셋은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쩌면>의 사내 애들 버전이라고 불러도 될까... 죽은 친구는 살아 있는 친구를 살피고, 살아 있는 친구들은 소파를 나른다.
「공기 없는 밤」.
“... 이상한 일이었다. 두번째 영화를 보고 나서야 첫번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세번째 영화를 보고 나니 첫번째 영화와 두번째 영화가 다르게 이해되었다. 그런 식으로 열 편의 영화들이 겹쳐졌다...”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이 소설집에는 모두 열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그리고 간혹 어떤 소설들의 내용은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물고 들어간다. 여하튼 소설은 영화 오래 보기 대회가 벌어지는 상황을 토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게 또 영화 오래 보기 대회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구성이기도 하다.
「부메랑」.
“나는 가을에 태어났다. 태몽은……...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거든 그 첫 문장을 지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쓸 것이다... 내가 죽은 지 1년이 지났다...” 이번 소설집 속 작가의 키워드는 죽음, 가족, 친구이다. (어쩌면... 이 키워드는 이 작가의 대부분의 작품의 키워드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자서전을 쓰는 나는 오래전 휴대폰을 찾아서 오래전 친구의 번호를 알아내고, 그렇게 오래전 기억을 끄집어 내어, 자신의 자서전을 수정할 생각에 이르게 된다.
「눈사람」.
“... 눈사람의 머리 부분이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눈, 코, 입은 이미 일그러졌을 것이다. 눈사람이 다 녹으면, 아니, 마당의 목련나무에 새순이 돋으면, 아니, 목련꽃이 다 떨어지면. 아니, 여름 긴 장마가 시작되면……...” 금고 가게 사장인 나와 남겨진 아들 사이를 관통하는 것은 무엇일까. 덮고 덮고 또 덮어 보아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눈사람의 핵심에 접근하기가 쉽지는 않다.
「5초 후에」.
“난 사라질 거야... 언제? ... 5초 후에...” 점점 사라져가는 나는 Y와 함께 어린 시절 묻어 놓은 타임 캡슐을 찾아 학교를 찾았다. 하지만 사라져가는 나의 몸뚱이만큼이나 과거의 흔적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가볍고 그래서 날아오를 것 같은 우리들의 어떤 일면에 대한 탐구라고나 할까...
「소년은 담 위를 거닐고」.
여섯 명의 친구...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이야기들이 유독 많은 소설집이다. 서사가 없으니 그 구분이 쉽지는 않다. 그렇다고 집중을 해서 읽고 풀어야 하는 퍼즐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저절로 기술되는 이야기들에 바짝 귀를 갖다 댈 필요는 없다. 그렇게 담 위를 거니는 소년을 바라보듯 의아한 표정으로 소설을 쳐다보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구름판」.
“... 제가 가거든 마당에 모래를 깔아주세요. 그리고 하얀색 구름판도 놓아주세요... 잠시 후 아버지에게 짧은 답장이 왔다... 그래 알았다. 폴짝, 팔짝, 그리고 펄쩍 뛸 수 있게....” 제자리멀리뛰기로 3미터를 날아가고 싶은 나, 매일 술에 취해 들어와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는 이모를 둔 나,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음식점을 하는 아버지를 둔 나, 그리고 K...
「느린 공, 더 느린 공, 아주 느린 공」.
"... 형의 최대의 무기는 느린 공이었다. 너무 느려서 아무도 치질 못했다. 형이 공을 던졌다. 나는 그 공이 날아오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느린 공이었다. 아주아주 느린 공. 나는 손바닥이 아픈 것처럼 엄살을 피웠다. 그리고는 말했다... 볼이야.“ 훌쩍 나이가 들어버린 내가 추억하는 형... 형과 나 사이, 현재와 과거 사이로 느리게 아주 느리게 날아다니는 이야기들...
수도 없이 난무하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길을 잃기 십상인 소설집이다. 어쩌면, 그러한 한결같음이 소설집으로서의 완결성을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라고 생각해본다. 물론 2007년에서 2010년 사이에 발표된 소설들을 모아 놓은 것이니 어떠한 일관성을 가지고 쓴 것은 아닐텐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여겨진다. 길은 잃어 헤매게 되지만, 그것이 또 우리가 살면서 찾아야 할 어떤 여유의 연유인지도 모른다.
윤성희 / 웃는 동안 / 문학과지성사 / 311쪽 / 2011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