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기표로만 부유하고마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있다. 그들은 결혼 적령기라고 할 수 있으며, 결혼 적령기의 남녀가 그렇듯 적당히 세속적이다. 이들은 조금 망설이지만 결국 서로를 선택하기로 한다. 아니 어쩌면 그녀 혹은 그가 그 혹은 그녀를 선택했다기 보다, 그저 서로를 배제하지 않기로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세속적이지만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다. 한 여자와 한 남자는 그렇게 결혼을 하기로 한다.
“아득한 현기증이나 멀미 같은 미미한 증상이 그들을 꼼짝 못하게 했다. 미열 같은 이것이 일생 동안 그들의 삶의 배경의 색조가 될 것임을 그들은 알아차린다. 미열 속에서 서로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덜 좋아하게 되었다. 조금씩, 눈에 띄지 않게.”
결혼을 하면 많은 것들이 해결될 것으로 여겼을 수도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크게 나을 것도 그렇다고 모자랄 것도 없는 그들은 모든 신혼 부부가 그러하듯 아이에 대한 독촉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향하여 올라가야 한다는 천편일률적인 비전에 먼저 붙들리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도달하려고 한 높이에 발을 들여 놓게 되지만 그것이 어떤 만족으로 다가오는 것 같지는 않다.
“... 무서움이나 극한의 경험에는 관성이 붙는다. 무서움은 더 큰 무서움으로 지워진다. 그렇게 해서 어느 날 무서운 것이 없게 된다. 관성은 새끼를 친다.”
남편과 아내가 된 뒤에 큰 위기가 오는 것은 아니다. 남편은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하여 출장 중에 여자를 사고, 아내는 주식 투자 중에 만난 중년의 남자와 데이트를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이 또한 너무나 흔한 일이니 이들의 일탈을 평균치 이상의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 사이 아내는 임신은 하였고 남편은 이번에는 더 이상 미루지 않고 낳기로 한다. 이들은 지극히 평범한 부부이다.
“결혼이, 부부 관계가 그들이 원래 지니고 있었던 자잘하지만 치명적일 수도 있는 악행들을 뿌리 뽑지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평범한 부부는 어쩌면 결혼한 이후 처음 갖는 단 한 번의 여행으로 전혀 다른 마지막을 맞이하고 만다. 어느 한적한 계곡, 그곳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석양, 텐트에서 자고 있는 아이, 차 안에서의 섹스... 지극히 평범하게 이어지던 이들의 일상은 어느 순간 비틀리고, 휩쓸리고, 뒤집히고, 굴러 떨어지고, 이제 이들의 아이만이 세상에 남겨진다.
‘세상에는 뜻으로 번역되지 않는 언어의 신비로운 지대가 있다. 오릭맨스티는 그런 언어의 한 조각이다.’
그 아이는 우여곡절 끝에 벨기에로 입양되었고, 그곳에서 아이는 알 수 없는 병으로 혼란스럽다. 시간이 지나 자라난 아이는 혼절과도 같은 잠의 끄트머리에서 오, 릭, 맨, 스, 티라는 다섯 음절을 발음하며, 그것은 곧바로 소설의 제목이 된다. 그렇게 평범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 박서호와 그만큼이나 평범하였던 어머니 윤향림의 남겨진 아들 박유진은 씨니피에, 기의의 부재 속에서도 씨니피앙, 기표로 우뚝 선다, 는 설정이다. 그리고 벨기에의 박유진은 오릭맨스티 혹은 자신의 뿌리 혹은 씨니피에, 기의를 찾아서 한국을 방문하여 부모가 한꺼번에 죽은 계곡을 찾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 된다.
언어에 대한 탐구를 특기로 하는 작가는 이렇게 특별할 것 없는 인물들의 조합 아래에서 다소 의아한 단어를 탄생시킴으로써 색다른 소설적 실험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 실험의 성과를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망설여진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한 여자와 한 남자의 만남과 결혼과 출산이라는 소설의 앞 부분과 그들의 죽음 이후 박유진의 벨기에의 행적으로 이루어진 소설의 뒷부분은 아무래도 적절히 섞이지 않는다. 오릭맨스티라는 단어의 출현은 난데없고, 이러한 난데없음을 해소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어떠한 소설에서는 이러한 난감함이 기분 좋은 모호함으로 탈바꿈하기도 하지만 <오릭맨스티>는 그런 지경에 다다르지 못했다. 오랜만에 발표된 작가의 작품임에도 왠지 서두르고 있어서 고스란히 서툴게 받아들여진다. 좀더 다듬어져야 했거나 어느 순간 멈춰야 했다.
최윤 / 오릭맨스티 / 자음과모음 / 227쪽 / 2011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