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자서전》안드레아 케르베이커

'어느 베스트셀러의 기이한 운명'이란 부제 그대로...

by 우주에부는바람

“이 책을 세상에 내보낸 이탈리아 태생의 작가는 책을 다룬 대개의 문필가들이 그러하듯 애서가이며 장서가라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의 이야기를 쓰게 된 동기가 참으로 흥미롭고 약간은 감동적이다. 그는 고명한 정신분석가의 장서 2,000권을 고서점에서 우연히 헐값으로 손에 넣은 행운을 기뻐하면서도 잡동사니 취급을 당한 그 책들의 마로에 분개하여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책의 자서전』은 말하자면 한 애서가의, 책에 바치는 진혼가이다.”




오랜 시간 책을 사고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기억에 남아 있는 내가 읽은 가장 오래된 책은 아마도 계몽사에서 나온 50권짜리 전집(지금 생각해보면 세계 명작의 축약본 같았던 것이러니)의 첫 번째 권(이솝 이야기였던 것 같다)이었을 것이다. 이후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위인전집과 백과사전을 차례대로 읽었다.


10여권짜리 한국사가 집으로 배달되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삼총사라 불리우던 친구 둘이 우리집에 찾아와 나를 불러냈지만, 난 그날만큼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그 얼마전 사촌 누나에게서 생일 선물로 받은 샤프(연필이 아니라 샤프 펜슬,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지 알 수 없으나)를 빼어 들고는 멀미가 날 것 같은 머리를 진정시키며 붉고 거만해 보이는(지금까지 읽던 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웠다) 표지를 열었다.


하지만 이렇게 내 초등학교 시절을 풍성케 했던 책들 중 지금까지 내 곁에 남아 있는 것은 한 권도 없다. 대부분은 잦은(참고로 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네 곳씩 총 여덜 곳을 다녔다) 이사의 과정에서 사라지거나 폐지로 팔렸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책들은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그레이트 북스 시리즈 중 단테의 신곡,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등이다.


『책의 자서전』은 이렇게 사라져버린 나의 책들, 그 책들의 유랑 궤적을 밝히는 것처럼 가슴 절절하다. 책의 말미에 실린 어느 애서가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이 책의 배경에는 이런 연유가 있다.


“이 책을 세상에 내보낸 이탈리아 태생의 작가는 책을 다룬 대개의 문필가들이 그러하듯 애서가이며 장서가라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의 이야기를 쓰게 된 동기가 참으로 흥미롭고 약간은 감동적이다. 그는 고명한 정신분석가의 장서 2,000권을 고서점에서 우연히 헐값으로 손에 넣은 행운을 기뻐하면서도 잡동사니 취급을 당한 그 책들의 마로에 분개하여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책의 자서전』은 말하자면 한 애서가의, 책에 바치는 진혼가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어떤 ‘책’이다. 주인공인 책은 1938년에 발간되었고 출판 당시에는 꽤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60여년의 세월 동안 세 명의 주인의 손을 거치고, 다른 미디어의 출현을 거치면서 책은 많이 쇠락해져 이제는 고서점의 한 켠에 놓여진 채 다른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고보니 이런 장르가 우리 문학에도 있지 않았나? 가전체 문학이라고...)


책은 지금까지 열일곱 청년이었던 첫 번째 주인, 아방가르드 작품을 주로 읽었던 두 번째 주인, 시나리오 작가였던 세 번째 주인까지 세 명의 손을 거쳐왔다. 그 사이 라디오의 등장과 TV의 등장, 주인이 세계대전에 참전해 있는 동안 박스에 포장되면서 겉표지를 잃은 사건, 처음으로 여인의 손에서 페이지가 넘겨질 때의 색다른 느낌 등을 느꼈고 그 사이사이 다른 책들과 교류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긴 시간 동안 노쇠한 몸을 고서점 한 켠에 의탁한 채, 팔리지 않으면 모두 폐지로 넘겨버리고 폐점을 하겠다는 고서점 주인의 말에 불안해하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책’이 아니어도 책은 묘한 존재다. 물질적인 쓸모의 평범함과는 무관하게 그 안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또 다른 세계가 숨겨져 있다. 게다가 그 세계는 어떤 주인을 만나 어떻게 읽히느냐에 따라 무수한 모양으로 변이가 가능한 유기체의 형질을 지닌다. 사라지되 끊임없이 변형되어 재생산된다. ‘어느 베스트셀러의 기이한 운명’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의 자서전』은 그렇게 다른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로만 읽혔던 책, 그 이면에서 소홀하게 대해졌던 책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안드레아 케르베이커 / 이현경 역 / 책의 자서전 / 열대림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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