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와 위트, 성찰과 관조, 거리두기와 몰입, 이 모든 것이 적당한...
*1999년 5월 5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적당한 유머와 위트, 적당한 성찰과 관조,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몰입이 동시에 가능해서 좋았던 영화다.
아내의 불륜을 주장하는 편지를 받은 야마시타는 밤낚시를 하다말고 집으로 돌아온다. 야마시타는 자신의 아내가 외간 남자와 섹스하는 장면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다가 슬며시 들어가 자신을 쳐다보는 아내의 눈을 똑같이 쳐다보며 수십 차례의 칼질로 아내를 살해한다. 쉘 위 댄스에서의 그 남자 야쿠쇼 코지의 그 수더분하던 눈빛이 문틈을 통과할 때, 아내의 몸을 향해 칼을 내리 꽂을 때 전혀 다른 사람의 그것으로 변한다. 그리고 야마시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경찰서에 찾아가 자수한다.
8년 후 야마시타는 보호사의 관찰 아래 가석방을 하고 이발소를 차린다. 그리고 흘러든 여인 게이코의 죽음을 방관하지 못한 탓에 이발소에서의 두 사람의 절반의 동거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야마시타는 감옥에서 기르기 시작한 장어하고만 대화할 뿐 주변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감옥의 옛동료는 야마시타를 협박하고, 게이코의 옛애인은 이발소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린다.
간통이라는 패악을 저지른 야마시타의 부인, 그를 살해하는 패악을 부린 야마시타, 자신의 몸을 죽음의 벼랑으로까지 몰고가는 게이코, 게이코의 어머니가가진 돈만을 노리는 패악의 옛애인, 살해한 아내의 명복을 빌지 않고 게이코와 놀아난다며 패악을 부리는 야마시타의 감옥 동료... 하지만 이들이 시들 듯 피 듯 스며들어 있는 사하리라는 지명의 시골 마을과 그 마을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패악을 거두도록 만들어 준다.
우주선을 기다리는 청년, 의리로 넘치는 목수, 어설프지만 빨간색 차를 모는 제비(그저 느낌이 그렇다), 그리고 보호사인 스님 내외, 이들 영화 속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기이한 인연들과 그 인연들을 어느 하나 허투루 다루지 않는 연출이 잘 어울리고 있다. 특히 영화의 시작 즈음에 야마시타가 받은 편지, 즉 그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전잘한 그 편지의 정체에 대해 가지는 의구심은 또다른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만약 그 편지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야마시타의 이후의 행보는 지금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영화 전체가 흔들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인물과 사건의 전개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그 순간 문득 장자의 꿈 속의 꿈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어쨌든 야마시타와 게이코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안을 자세를 갖추고, 야마시타는 이제 장어르 강물에 띄워 보낸다. 그 장어가 적도 근처의 바닷가에 가서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다시 그 강물로 돌아올 즈음, 야마시타는 가석방 중 저지른 상해로 다시 들어간 감옥 생활을 마치게 될 것이고, 게이코는 아이를 낳게 될 것이다...
우나기 (うなぎ, The Eel) /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 야쿠쇼 코지, 시미즈 미사, 토키타 후지오, 바이쇼 미츠코 출연 / 117분 / 1999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