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수 《설계자들》

유구한 폭력의 역사, 그 역사의 한 챕터 속으로 고고씽...

by 우주에부는바람

*2010년 11월 11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캐비닛》 이후 벌써 4년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익숙하지 않아서 더욱 마음이 가는 상상력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던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설계자들》이 도착했다. 전작과는 달리 좀 더 사회에 밀착된 모습을 띠고 있지만 그 재기발랄한 상상력만큼은 여전해서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역시,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는지 모른다. 우리 사회의 어둡고 포악한 부분을 향하여 작가는 특유의 엉뚱한 시선을 온전한 문장에 실어 들이밀고 있다.


“더럽고 냄새나고 가엾고 역겨운 곳. 푸주는 그런 곳이다... 쓸모없는 연민과 슬픔, 무한정 번식하는 무기력과 갈 곳 없는 울분이 늦가을의 낙엽처럼 이리저리 쓸려다니다 자멸하는 곳. 바닥으로 떨어진 인생들의 종착지. 위조 전문가, 세탁업자, 살인 청부업자, 무면허 의사, 사채업자, 밀수업자, 청소부, 포주, 보험 사기꾼, 마약상, 장기 매매업자, 무기업자, 시체 처리업자, 자객, 사냥꾼, 용병, 트래커, 해결사, 도둑, 장물아비, 사기 도박업자, 범죄자와 결탁한 형사들. 밀고자와 배신자들이 온갖 종류의 브로커들과 얽히고설켜 여름날의 수캐들처럼 헐떡이며 돈이 될 만한 것들의 냄새를 맡고 다니는 곳...”


소설은 푸주라는 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래생이라는 사내를 주인공으로 삼아 진행된다. 어린 시절 쓰레기통에 버려진 것을 푸주에 있는 도서관의 주인인 너구리 영감이 주워 키운 래생은 그렇게 훈련을 거쳐 암살자로 키워진다. 너구리 영감이 살인의 의뢰를 받으면 트래커들에 의해 살인의 대상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고, 그 결과물을 토대로 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설계자들에 의해 살인의 계획이 세워지면, 바로 래생과 같은 암살자들에 의해 살인이 실행되는 것이다.


“... 문득 이 고요한 도서관이 지난 90년간 암살단의 본거지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무수한 죽음들이, 그 숱한 암살과 의문의 실종과 위장된 사고사와 감금과 납치가 이 도서관에서 계획되고 결정되었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누가 이 따위 도서관을 만들고 이 끔찍한 삶들을 도서관에서 시작하려고 했던 것일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는 흘러 서슬 퍼렇던 독재 정권의 비호 속에서 승승장구하던 이 암살단 조직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게 되고, 그곳에 몸 담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변화가 생긴다. 암살단 조직의 정신적 지주로 여겨지던 너구리 영감에게는 한자라는 도전자가 생겼고, 전설적인 암살자였던 추는 의뢰받은 살인을 제대로 진행시키지 않아 결국 또다른 킬러 이발사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으며, 래생은 설계자인 미토에게 이끌려 이제 이 전무후무한 암살단 조직의 세계를 와해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가장 오래된 인류의 두개골에는 창으로 찔린 자국이 있지. 창녀와 포주는 농부보다 훨씬 더 오래된 직업이고,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아들이 한 일도 살인이었지. 그 이후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오로지 전쟁을 통해서만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었지. 문명이건 예술이건 종교건 하다못해 평화도 말이야...”


꽤 두꺼운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생소한 캐릭터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소설의 말미까지 긴장감을 자아낸다. 어떤 큰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도 안 되는 소스들을 가지고 서사를 구축하는 재주는 놀라워 보인다. 우리들 주변에서 익숙한 폭력, 그 유구한 폭력의 역사를 때로는 비장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있다고 해야 할까. 흥미로운 작가이다.



김언수/ 설계자들/ 문학동네 / 422쪽 / 2010 (2010)

keyword
작가의 이전글듀나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