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는 듀나식 상상력의 나무는 어디까지...

by 우주에부는바람

가요계에 얼굴 없는 가수가 있다면 문학계에는 얼굴 없는 작가, 듀나가 있다. 아이디가 곧 익명이던 시절부터 시작된 듀나의 문학 활동은 이제 아이디가 곧 하나의 명명이 되어버린 현재까지도, 바로 그 듀나라는 기명으로 명명백백하게 이어지고 있다. 새로운, 그러나 새롭지 않을 수도 있는,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현재를 포함하여) 작가의 창작 활동에서 길어올린, 열 세 개의 (어째 음산한 숫자 아닌가) 단편 혹은 엽편 소설 모음집이다.


「동전 마술」.

1999년 부모의 강요로 보게 된 선에서 만난 대학원생 김민영, 그녀가 보여준 동전 마술은 바로 일정한 시간에, 어떤 공간에 생긴 틈새를 찾아 동전을 날려버리고, 그래서동전을 사라지도록 만드는 동전 마술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이정기, 나의 머리에 떨어지는 백원짜리 동전이 되어 다시금 나타난다.


「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

상대방의 머리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소설 속의 인경은 포털에 자신의 경험을 올리고, 급기야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로 구성된 국제적 모임을 만드는 것으로 이어가고, 모임을 가지며, 그 물음표의 등장의 기원을 찾아 나선다.


「메리 고 라운드」.

현아와 정화와 은주라는 세 명의 레즈비언 여성들이 서로를 항하여 품는 사랑과 질투는 삶과 죽음의 경계 마저도 뛰어 넘으며 이어진다.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이어지는 세 여인의 이름은 전체적인 내용 파악을 위한 행보에 훼방을 놓지만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아 있는 사람과 죽어 있는 사람, 첫 번째 커플과 두 번째 커플의 구별 정도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


「A, B, C, D, E & F」.

A와 B의 사랑은 사이버 공간을 통하여, 아니 사이버 공간이어서 가능한 C와 D와 E와 F의 창조를 통하여 사슬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진행된다.


「호텔」.

“... 나에게 종종 형편없는 패션 센스를 가진 개성적인 여자들에게 매료되는 변태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그들에겐 완벽한 패션 센스가 제공해주지 못하는 불가해한 서스펜스가 있다.” 어떤 게임의 플레이어, 혹은 게임과도 같은 리얼 플레이로 이루어진 짧은 엽편인데, 이상하게 위의 문장만이 맴돈다.


「죽음과 세금」.

SF 버전의 음모론이라고나 할까. 외계 병원균인 므두셀라 병원균에 감염된 몇몇 인류는 불사신이 되지만, 세계 정부는 이 사실에 오히려 당황하게 되고, 이러한 불사의 인류를 적당한 순간에 죽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더욱 많은 바이러스들을 발견하여 투여하게 되었고, 평범하던 채승우가 바로 이 음모의 핵심에 아주 근접하게 접근하였다가, 결국 기억이 말소된 채 쓸쓸하게 죽음을 맞인한다는...


「소유권」.

‘소설의 68퍼센트, 영화의 56퍼센트가 인공지능에 의해’ 쓰이고 만들어지는 세상, 작금의 신을 대체한다고 할 수 있는 시스템의 생각을 어찌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엽편들 사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중편 분량의 소설이다. 2009년 4월 1일 오후 4시 23분 외계 우주선과의 첫 조우 이후 지구인은 얼렁뚱땅 외계의 여러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게 되고, 그렇게 여러 루트를 통하여 인류는 이제 세계 곳곳이 아니라 우주 곳곳의 행성을 떠돌면서 유랑 생활을 하거나 때때로 정착하여 살게 된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이념의 갈등은 그곳에도 남아 있어 이제 빨갱이라고 불리우는 북쪽 출신의 남자 진호와 그가 데리고 다니는 아이들, 그리고 이들을 향하여 적의를 숨기지 않는 청수 사이의 혈투가 펼쳐진다.


「여우골」.

‘내 식으로 쓴 <요재지이> 단편’이라는 작가의 표현이 딱 맞겠다. 여우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들어간 이생이라는 선비가 겪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이다.


「정원사」.

‘창조주는 창조물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는 커다란 오류로 인하여 자신이 만든 콜로니 안에서, 완벽을 추구해야 한다는 자신의 컴퓨터의 임무 안에서, 스스로 나무 묘지가 되어버린 한 과학자의 이야기이다.


「성녀, 걷다」.

열 세 개의 소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 짧은 글을 읽는 동안 나는 ‘K시의 성녀’라는 이름으로 불리운 이 성녀의 동상이 수백년에 걸쳐 자신의 작업장을 빠져나와 도시를 가로지르는 장면을, 실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안개 바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와 맞닿아 있는, 그러니까 지구를 떠나 유랑하던 인간이 정착한 행성에서 인간과 개와 기타 하이브리드한 동물들로 이어지는 우주 행성 역사 다큐멘터리라고 해야 할까.


「디북」.

죽음의 직전에 놓인 사람들의 정신을 떼어내어 만든 아바타로 이루어진 제3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고 인간에 의해 조정되는 매트릭스 세상이라고 해야 할까.



듀나 /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 자음과모음 / 383쪽 / 20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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