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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Nov 07. 2024

유시민 《청춘의 독서》

세속에서 세속적이지 않게 살아남기 위하여...

  1988년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에 이미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전설이 되어 있었다. 1985년 당시 스물여섯 살이던 대학생 유시민이 서슬퍼런 군사정권 하의 재판부를 향하여 한 자 한 자 자신의 손으로 써내려간 <항소이유서>는 우리가 얼마나 반민주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논리로 무장할 수만 있다면 폭압적인 권력 앞에서 이렇게 당당한 억양으로 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이후에도 항상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서 강한 자에게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논리로 압박을 가하고, 약한 자에게는 조근조근 설득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유시민의 글을 오랜만에 읽었다.

 

  유시민의 산문은 과거에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던 책을 다시 꺼내어 읽으면서 느낀 점을 서술하고 있는데, 유시민은 이 글을 이제 막 사회에 나아가는 첫걸음을 뗀 자신의 딸을 위하여 쓰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말이니 그것에 거짓이 끼어들어 있을 리 없고 허투루 지껄이는 것이 아니라, 고 독자들을 향하여 선서하는 것이려니 느끼게 된다.  


  작가는 열네 권의 책들을 소재로 하여, 그 책을 읽을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하였으니 세월이 흐른 지금 새롭게 발견한 것들을 우리들에게 전달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러한 작가의 생각들은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 현재에도 우리들에게 유효하다, 그렇게 유시민은 믿고 있다. 유시민이 <청춘의 독서>라는 제목과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열네 권의 책 목록은 아래와 같다.


  표도르 도스토엡스키의 『죄와 벌』.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대위의 딸』. 맹자의 『맹자』. 최인훈의 『광장』. 사마천의 『사기』.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몇 권은 읽었고, 몇 권은 읽었다고 여기고 있으나 실제로는 읽지 않은 것 같고, 몇 권은 읽기는 있었으나 제대로 읽지 않았고, 또 몇 권은 처음 들어보는 책이다. 동서양을 망라하였고 소설에서 고전까지 경제이론서에서 역사서까지를 두루 섭렵하고 있는 커리큘럼이고, 그야말로 청춘의 시기에 읽으면 좋을 책이거니와 육체적인 나이가 청춘의 시기를 벗어났지만 마음 속의 패기만은 청춘인 사람들이 읽어도 좋은 책들의 목록이다. 그냥 책을 덮기 아까워 각각의 책들에 대한 유시민의 생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부분들을 오려붙이자면 이렇다.


  위대한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 표도르 도스토엡스키의 『죄와 벌』. “... 20세기 세계사는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수없이 많은 소냐와 두냐들이 좋은 세상을 만든 것이다. 만약 도스토엡스키가 20세기를 목격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선한 목적은 선한 방법으로만 이룰 수 있다.’”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청춘을 뒤흔든 혁명의 매력 ;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 비록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할지라도, 언제나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어두운 그림자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어찌 고맙고 귀하지 아니한가.”


  불평등은 불가피한 자연법칙인가 ;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 “다시 『인구론』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우리 모두는 갖가지 편견과 고정관념을 지니고 산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통념이 논리적 경험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일일이 시험하고 검토할 수 없는 일이기에, 많은 경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념과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인구론』과 맬서스는 금이 간 거울이다. 내 생각도 그릇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일그러져 있지 않은지 경계하면서, 거기에 나를 비추어 본다. 생각은 때로 감옥이 될 수 있다!” (다른 책들과 달리 잘못된 편견이 포함된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보여준다고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대위의 딸』. “푸시킨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세 사람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여생을 누렸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세월이 하사하는 망각의 축복을 얻지 못했다. 반면 당시 러시아 민중의 사랑을 받았던 푸시킨의 시는 오늘날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인류 문명이 지속되는 한 그의 시는 읽히고 또 읽힐 것이며, 푸시킨의 시가 잊히지 않는 한 오욕으로 얼룩진 그들의 이름 또한 잊히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를 만나다 ; 맹자의 『맹자』. “보수가 이념이 아니라 ‘연속성과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전통적인 제도와 관습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말하는 것일면, 맹자는 정말 멋진 보수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흔히들 보수가 물질적 이익과 세속적 출세를 탐낸다고 하지만 진짜 보수주의는 이익이 아니라 가치를 탐한다...”


  어떤 곳에도 속할 수 없는 개인의 욕망 ; 최인훈의 『광장』. “이명준은 남도 북도 싫어서 제삼국을 선택했다... 그러나 1980년대의 이명준들에게는 그런 선택권이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사파 청년들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시민으로 복귀했다. 관념적인 북한 체류와 결별하지 못한 사람들도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을 관념적 월북으로 내몰았던 바로 그 세력의 품으로 들어갔다. 이명준이 다시 남으로 돌아와, 자기가 월북해서 목격한 북의 독재와 비인간적 사회질서를 폭로하고 규탄하는 강연을 하며 살아가는 반공 투사가 된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뉴라이트, 또는 북한민주화운동가라고 했다. 슬픈 풍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투쟁의 빛과 그림자 ; 사마천의 『사기』. “정치는 위대한 사업이다.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적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한신과 유방이 빛을 좇는 불나방처럼 권력을 향한 본능에 이끌려 투쟁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인의를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이 모든 것들을 기록해 인류에게 선사한 역사가 사마천의 삶에 대해 깊은 존경과 높은 찬사를 바친다.”


  슬픔도 힘이 될까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 결국 남은 것은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사람. 땀 흘려 일하는 사람. 때로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만드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모습에서 얻는 감명이 25년 세월을 견디고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나는 이번에 알게 되었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인가 ;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 인간은 모두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타적 행동을 하는 이기적 동물이다.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동물임을 과소평가하면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또한 이타주의와 자기희생이라는 고귀한 도덕적 재능을 진화시켜온 존재임을 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벌거벗은 탐욕과 아귀다툼이 판치는 살벌한 야만으로 몰고 갈 위험에 빠진다.”


  우리는 왜 부자가 되려 하는가 ;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베블런의 주장은 현실에 잘 들어맞는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과 사회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이었다. 나는 그가 호모사피엔스를 과소평가했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생활한경의 변화에 똑같이 노출되어도 사람들의 반응은 서로 다르다. 인습적 사고와 행동 방식을 바꾸는 데 민감하고 능동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둔감하고 소극적인 사람도 있다. 전자는 진보적이고 후자는 보수적이다...”


  문명이 발전해도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진보와 빈곤』에서 나는 영혼의 외침을 듣는다. 토지 사유는 범죄이며, 지대를 징수하는 행위는 도둑질이라고 소리쳐 고발하는 외침. 이것은 조지의 영혼이 내지르는 외침이다. 선입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바로 자기 자신의 영혼을 때린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외침이다. 불로소득을 규탄하는, 자기의 영혼으로 외치고 타인의 영혼을 울리는 외침!”


  내 생각은 정말 내 생각일까 ;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카타리나 블룸은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을 길이 없어서 기자를 총으로 쏘아 죽이는 복수의 길을 선택했다... 그런데 퇴임한 지 15개월밖에 되지 않은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은 카타리나 블룸과 똑같은 상황에 봉착하자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이는 길을 선택했다. 검찰 조사실에서 오간 대화가 교묘하게 왜곡된 형태로 특정 신문을 통해 중계되듯 보도되고, 문제가 된 사건의 본질과 무관한 사항들이 흘러나와 ‘피의자’를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가운데, 가족과 친지, 친구 등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어간 그 모든 일들은, 35년 전 독일에서 나온 이 소설에서 뵐이 묘사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역사의 진보를 믿어도 될까 ;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그는 내게서 역사와 사회에 대한 개안開眼의 기적을 일으켰고, 어느 정도 내 삶을 바꾸어놓았다. 다른 삶을 살았더라도 가치 있는 삶일 수 있었겠지만, 그의 영향을 받았던 실제의 내 삶에 나는 불만이 없다.”

 

 

유시민 / 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 웅진지식하우스 / 320쪽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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