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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8시간전

옥타비아 버틀러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소설이 시작되는 2024년은 이제 겨우 2년이 남았는데...

*2022년 4월 24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 나는 그 개가 죽는 것을 느꼈다. 그랬으면서도 죽지 않았다. 나는 그 개의 고통을 마치 인간의 고통처럼 느꼈다. 개의 생명이 화르르 타올랐다가 꺼져버리는 것을 느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p.80)


  주인공인 열다섯 살의 소녀 로런 올리미나는 초공감증후군(hyperempathy syndrome)을 갖고 태어났다. 로런의 어머니가 임신 중에 복용한 약 때문이다. 초공감증후군을 지닌 이는 상대방의 고통이나 쾌락을 자신도 똑같이 느끼게 된다. 로런은 어느 날 개를 죽이게 되는데, 그 살해 행위를 통해 개의 고통 또한 자신이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문제는 개가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폭력과 살인이 만연한 시대를 소녀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게는 진리처럼 보이는 ‘변화가 곧 하느님’이라는 특이한 신앙 체계는 지구의 씨앗이라는 뜻에서 ‘지구종地球種’으로 이름 지을 것이다... 오늘 신앙의 이름을 찾았다. 뒷마당에서 잡초를 뽀으며 식물이 스스로 씨앗을 뿌리는 방식, 즉 바람이나 다른 동물이나 물을 이용해 모체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씨앗을 퍼뜨리는 방식에 관해 생각하다가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지구종이다. 누구나 지구종이 될 수 있다. 언젠가는 우리 같은 존재가 많아질 것이다. 우리는 죽어가는 이 땅에서 멀리,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우리 자신을 심어야 할 것이다.” (pp.136~137)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는 2024년에서 2027년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소설이 1993년에 씌어졌으니 당시로서는 꽤 먼 미래, 그러니까 삼십 년 후를 배경으로 삼은 셈이지만, 어찌어찌 하다보니 당장의 시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소설 속의 2020년대는 일자리는 사라지고 얼마 남은 노동자는 노예가 되어 버리고 중산층은 장벽을 세워 그 안에서 조마조마하게 기거해야 하는 시대이다.


  “그대가 손대는 모든 것을 / 그대는 변화시킨다. // 그대가 변화시킨 모든 것은 / 그대를 변화시킨다 // 변치 않는 진리는 오로지 / 변화뿐. // 변화가 곧 / 하느님이다.” (p.139)


  소녀 로런은 바로 그러한 시대에 초공감증후군을 지닌 이로 태어났고, 교회 목사인 아버지 그리고 새엄마와 배다른 동생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30킬로미터쯤 떨어진 로블리도라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는 총 쏘는 법을 배우고, 마을을 둘러싼 장벽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갈 때는 자전거를 타고 무리를 지어 다녀야 한다. 하지만 사회는 점점 더 나쁜 방향으로 치달을 뿐이고, 결국 그녀는 아버지와 새엄마 그리고 이복동생들을 차례로 잃는다. 


  “... 모든 종교는 다 변하게 마련이야. 덩치가 큰 종교들을 떠올려봐. 그리스도가 지금 세상에 태어났다면 뭐가 됐을 것 같아? 침례교 신자? 감리회 신자? 가톨릭 신자? 부처는 또 어떻고. 만약 부처가 지금 세상에 태어났다면, 불교를 믿기는 할까? 믿는다면 어떤 식의 불교를 실천하려고 할까? 결국에는, 만약 ‘변화가 곧 하느님’이라면, 지구종도 틀림없이 변할 거야. 지구종이 오래도록 남는다면 그렇게 되겠지.” (pp.463~464)


  소녀는 이 어두운 세상에 의심을 드리우고 스스로 ‘변화하는 하느님’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노트에 메모를 남기기 시작한다. 소설의 작은 챕터들에는 《지구종: 산 자들의 책》에서 발췌한 글들이 있는데, 그 책들이 바로 이 메모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을 잃은 다음 길을 나선 로런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로런을 제외한 최초의 ‘지구종’들일 것이다. 


“이제 이곳에 남기로 한 결정은 일행들의 인정을 받았다. 더는 논쟁할 필요도 없다. 내일 우리는 경루 텃밭을 일굴 준비를 시작할 것이다. 다음 주에는 일행 몇이 마을에 가서 연장과 다른 작물의 씨앗, 생필품 따위를 사올 것이다...” (p.578)


  소설은 애초에 근미래 디스토피아를 다루고자 했을 것이다. 소설에는 불을 지르고 싶어지게 만드는 마약이 등장하고, 경찰은 피해자에게 냉담하며, 갱단들은 무리를 지어 약탈을 자행하고, 약한 이들은 강한 이의 먹잇감이 되며, 거리에는 시체가 즐비하고, 식인의 풍습이 새롭게 등장하며, 산과 주택은 방화에 의해 수시로 불탄다. 생각해 보면 소설이 시작되는 2024년은 이제 겨우 2년이 남았다.



옥타비아 버틀러 Octavia E. Butler / 장성주 역 /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Parable of the Sower) / 비채 / 585쪽 / 2022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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