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만하면서도 직설적인, 기타노 다케시스러운 화법...
*2009년 9월 24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열만 있으면 딱 신종 플루일 수도 있겠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열은 나지 않는다. 아직 신종 플루쯤으로 생사가 갈리는 나이는 아니라서 그냥 며칠 놀고 먹을 수도 있었는데 싶기도 해서 불행이고, 이 사람 저 사람 귀찮게 하지 않을 수 있으니 다행이지 싶다. 누군가 어깨에 무등이라도 타고 앉은 것같은 몸살 기운이 성가시기는 하지만 내 생애 가장 혹독한 시기를 어떻게든 건너온 다음에 감기가 찾아와주니 그것도 내 복이려니 해야겠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봤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꽤 그의 영화들을 봤다. 그가 감독하거나 출연한 영화, 혹은 감독과 출연을 겸한 영화를 합치자면 열 편은 거뜬히 넘는 것 같다. 대신 비트 다케시라 칭해지며 종횡무진하는 그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보지 못했다. 십여년전 일본에 갔을 때 얼핏 우스꽝스러운 스타일로 텔레비전에 등장한 그를 보기는 했으나 그걸 봤다고 해야 할지...
그런 기타노 다케시의 산문집이니 꽤 도발적이리라 생각했는데 절반은 그렇고 절반은 그렇지 않다고 봐야겠다. 코미디언이 아닌 감독 다케시를 닮아서 꽤 진지한 내용들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또 어느 부분에서는 터무니없이 직설적이어서 오히려 읽는 내가 얼굴이 화끈거린다고나 해야 할까. 예를 들자면 <교육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다케시가 그렇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보여주는 무시무시하도록 직설적인 장면들을 떠올려보면 이런 직설적인 화법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해야 할려나.)
“‘어린이는 훌륭하다’, ‘어린이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요즘 어른들은 그런 한심한 소리를 한다. 어린이들이 모두 훌륭한 건 아니지 않은가. 잔혹한 표현이지만, 멍청이는 멍청이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을 해야 겨우 일류가 될 수 있을까 말까 한 게 현실이다. 연습을 한다고 모두 이치로 선수처럼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다케시는 마치 구도자라도 된 것처럼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한다. 마치 장자의 꿈이라도 들여다보는 것처럼 다케시는 12년 전에 겪었던 오토바이 사고를 (책이 일본에서 출판된 것이 2007년이니 이제는 14년 전에 겪었던, 이라고 수정되어야 하지만) 되짚으면서 현재의 스스로에 대한 강한 불안감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를 포함해서 다케시는 <생사 문제> 라는 항목을 채워간다.
“살아가는 데 흥미가 없어져도 정신적 공포는 지워지지 않는다. 사고가 나고 12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것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특히 잠자리에 드는 밤에 공포가 엄습해온다. ‘내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아직 그 병실이면 어떡하지?’ 그 큰 상처에서 기적적으로 회복한 것은 그저 꿈이었고, 문득 눈을 뜨면 나는 여전히 병원에서 링거를 꽂은 채 12년째 줄곧 식물인간으로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지금 이것도 병실에서 꾸는 꿈이 아닐까?”
그렇게 다케시의 산문집은 생사 문제와 교육 문제를 포함하여 <관계 문제>, <예법 문제>, <영화 문제>라는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장이 시작되는 앞에는 기타노 다케시가 잘 가는 요리집의 주방장인 요리사 구마가, 생활에서 발견한 기타노 다케시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고, 이어서 기타노 다케시가 각각의 해당 파트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하는 식이다.
“문화는 모방으로 발전한다고들 한다. 아날로그식 모방은 그림을 흉내 내든 문장을 흉내 내든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완벽한 모방은 극히 어렵다... 그런 차이 때문에 어떤 작가를 모방하는 동안 자기 나름의 개성으로 발전시키는 경우가 생긴다... 하지만 디지털식 모방에서는 완벽한 카피가 아주 간단하다. ‘복사’ 해서 ‘붙여넣기’ 하면 그뿐이다...”
대체로 기타노 다케시는 조금 낡은 축에 속한다. 영화라는 가장 현대적인 문화 생산물을 만들면서도 동시에 그는 여전히 도제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만담 거리에서 만담하던 시절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하기는 규모만 다를 뿐 만담을 짜고 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것과 영화를 만들고 그것을 극장에 거는 일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말할 때는 그런 느낌이 확 다가온다고나 할까.
“박리다매라고 하면 옛날에는 바나나 싸게 팔기 정도였지만, 요즘은 지식이나 교양까지도 박리다매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런 상술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바보가 되어버린다는 건 생각하지 않는다. 바보가 된 대중에 맞춰서 점점 수준을 낮춰간다. 대중은 거기에 이끌려 갈수록 바보가 되고 천박해진다. 예법이니 하는 말도 머잖아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가하면 그의 글을 읽으면 달관의 경지 또한 얼핏 보게 된다. 죽은 목숨에 가까웠던 사고와 병원에서의 기간 그리고 얼굴에 드러나는 후유증들을 뚫고 다시금 정상에 선 사람이다보니 무시못할 공력으로 가득할 터인데, 자신의 현재를 무심한 듯 태연하게 툭툭 내뱉는다.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를 교묘하게 줄타기하는 그의 영화들을 떠올리면 너무 싱겁기까지 하다.
“나는 어째서 영화를 찍고 있는 걸까. 대학을 중퇴하고 아사쿠사로 굴러 들어와 엘리베이터 보이를 하다가, 유명한 만담가의 제자가 되어서 만담가가 되고, 배우도 하고, 드디어 영화감독이 되었다... 한 가지 일을 계속하면 확실히 질리기도 하고, 시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시시하다고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저쪽에서 다른 흐름이 찾아온다. 그것이 정말로 신기하다... 영화감독도 그렇다. 어느새 나 자신을 보니 영화감독을 하고 있었다.”
단순해서 그만큼 와닿는 말들도 있고, 단순해서 그만큼 버리고 가야 하는 말들도 있다. 기타노 다케시의 산문집에는 이런 말들이 공존한다. 스크린으로 모든 걸 말해야 하는 감독이면서 동시에 스스럼없이 브라운관을 통해 말할 수 있는 코미디언이기도 한 그이기 때문에 가능한 공존일 수 있겠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열심히 보던 시절이라면 좀더 집중할 수 있었을까 싶지만, 왠지 지금의 나로서는 조금 산만해 보인다고나 할까.
기타노 다케시 / 권남희 역 /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 노트 (全思考) / 북스코프 / 224쪽 / 2009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