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적인 시가전 대신 철학적인 심리전으로, 일상을 향하여 돌격...
<책 읽어주는 남자>의 작가인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집이다. 그의 소설들은 선과 악이 분명하지 않고 어딘지 모호하면서도 아니 바로 그 모호함 때문에 철학적이면서도 윤리적인 면에서 우리들의 의식을 환기시킨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우리들 살아가는 일상에 깊숙하게 침투하지만 대중적인 시가전을 감행하는 대신, 훨씬 느릿하고 지루한 심리전을 치르는 것으로 보이는 소설들이다.
「소녀와 도마뱀」.
전쟁 중에는 군인과 비슷한 업무를 하였고 패전 후에는 판사를 잠시 하다가 결국 더욱 허름한 말년을 보내야 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끝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그림에 얽힌 사연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지만 그것보다도 엄마와 아들이 나누는 이 대화가 뇌리에 가장 남는다. “왜 어머니는 아버지 곁을 지키셨나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유품에서 소녀와 도마뱀이 그려져 있는 그림을 가져가려던 아들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 생활을 떠올리며 이렇게 물었던 것 같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너도 젊었을 때 얼마 동안은 선택을 할 수 있어. 이것을 하거나 저것을 할 수도 있고, 이 사람과 살거나 저 사람과 살 수도 있지. 하지만 어느 날 너의 행동과 그 사랆이 네 인생이 되어버리는 거야. 그때 가서 왜 너는 네 인생을 지키고 있느냐고 묻는 건 정말 멍청한 질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멍청한 질문들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멍청한 질문이라고 하더라도, 또 우리는 현명하게 답해야만 하는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소설 속의 엄마처럼...
「외도」.
서독과 동독으로 갈라져 있던 시절... 하지만 양쪽의 왕래가 어느 정도는 용인되던 시절... “... 당신들은, 당신들 중 한 사람을 사귄다는 것이 특히 보다 깊이 사귄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할 거예요. 그것은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것을 뜻해요. 정신적으로 그리고 - 뭐 말하지 못할 것도 없지요 - 물질적으로요. 우리는 당신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당신들에게 질투 어린 눈길을 두지 않을 수 없어요. 그리고 우리는 당신들이 우리에게 느끼는 이국적인 매력이 혹시라도 닳거나 소진되어, 당신들이 다른 것들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시선을 돌릴까 봐 두려워요.” 동독의 파울라는 서독의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파울라와 스벤 가족 그리고 이들을 방문하는 나 사이의 우정 혹은 사랑 혹은 외도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감시하거나 감시당하거나 감시하는 자를 다시 감시하거나 해야 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다른 남자」.
만약에 아내가 죽은 이후 아내의 유품에서 아내의 ‘다른 남자’를 찾아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희귀한 사건을 겪은 나는 그 ‘다른 남자’를 찾아가는 여정을 선택한다. “... 나는 한 번도 결혼한 적이 없어요. 나는 결혼 체질이 아니에요. 나는 여자들에게나 맞는 체질이죠. 그리고 여자들은 내게 맞고요. 하지만 결혼이라……. 나는 사태가 심각해지면 도망쳐야 했어요. 나는 언제나 날쌨지요.” 죽은 아내를 대신하여 죽은 아내의 ‘다른 남자’와 대화하는 이 남자의 어둡고 습해 보이지만 허심탄회한 이야기이다.
「청완두」.
그의 파란만장한 역정의 시작은 사소했다. 함부르크로의 출장과 그곳에서 만난 베리니카라는 여인... 그렇게 이미 결혼한 남자였던 그는 베를린의 유타과 함부르크의 베로니카 사이를 오고가며, 점점 자신을 옥죄어 오는 두 여인을 넘나들며 살아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옥죔은 그에게 다시금 헬가라는 새로운 여인을 부여잡도록 만들고 그는 혼란에 빠진다. “가끔 그는 혹시 자신이 재빨리 그리고 완벽하게 모습을 바꾸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함부르크에 가서도 여전히 베를린의 토마스이거나 헬가와 함께 있으면서 아직 유타의 토마스로 남아 있을까 봐 말이다.” 하지만 결과는 이들 세 여인의 역전승, 그리고 그의 KO패... 궁금하면 살펴볼 일이다.
「아들」.
반군과의 싸움이 계속 진행중인 어느 위험 지역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감시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된 남자가 있다. 그리고 위험천만한 그곳에서 그는 아들을 떠올린다. 아내인 그녀가 젊은 남자와 만나면서 그로부터도 떠나게 된 아들에 대하여... “... 아버지는 아들의 눈빛 속에서 질문을, 그리고 어서 싸워서 눌러버리라는 바람을 보았으며 이어서 아버지가 항복하려는 데 대한 실망을 보았다. 그는 그녀의 남자친구를 호통치고 흠씬 두들겨 패주거나 아들을 데리고 도망쳤어야 마땅했다. 그 어떤 것이라도 그냥 그 상황에 순응하고 어깨를 으쓱하거나 아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색하게 유감과 격려의 미소를 짓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위기의 순간 우리 인간을 사로잡는 혈육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하나?
「주유소의 여인」.
어느 날 갑자기 15년 혹은 20년 동안 시들하기만 했던 아내에게 오래전 사랑의 감정을 닮은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될 수 있을까? “같은 사람과 두 번씩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두 번째엔 그 사람을 너무 잘 알지 않을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상대방을 아직 잘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상대방이 아직 나 자신의 소망을 투영시킬 수 있는 빈 공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게 아닐까?... ” 그리고 그렇게 새로이 시작된 사랑은 별다른 변덕없이 또한 지속될 수 있는 것일까? 오리무중의 질문으로 가득한 사념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베른하르트 슐링크 / 김재혁 역 / 다른 남자 (Libesfluchten) / 이레 / 343쪽 / 2004, 2009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