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무기력하다고 여기는 우리들 모두를 향한 미묘한 부추김...
살다보면 어느 순간 거부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시달리는 때가 있다. 이러한 무기력함은 예고를 하고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한번 깃들면 언제 빠져 나갈는지 알 수도 없다. 게다가 이런 무기력함은 감기 바이러스와도 같아서 한 번 들어왔다 나갔다고 해서 면역체가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사는 동안은 끊임없이 무기력함에 시달려야 하고, 다른 사람의 무기력함을 목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 소설의 주인공 에드처럼 말이다.
“내 이름이 에드 케네디다. 열아홉살, 법적 연령 미달의 택시 운전사다. 도시를 둘러싼 이런 변두리 지역에서 흔히 보게 되는 그저 그런 애들 가운데 하나다. 별 장래성도 없고 가능성도 없는 그런 애들 말이다. 그 외에, 필요 이상으로 책을 많이 읽고, 섹스와 세금 계산은 정말 엉망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 또한 나와 같이 종종 무기력함에 시달리곤 한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무기력함을 공유하다보면 자신의 무기력한 현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에드의 절친들, 마브와 리치 그리고 오드리라는 사각 편대, 이 네 명의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묘한 동료 의식은 바로 그러한 무기력함의 공유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어느 날 함께 들른 은행에서 강도를 만나고, 그 강도를 쫓아가 잡고 난 이후 네 명 중 에드의 삶에는 분명한 변화가 생긴다. 택시를 모는 일을 하는 변두리 지역의 한심한 스무살 청년으로, 엄마와도 사이가 좋지 않고 오랜 시간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에게는 자신의 마음조차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친구들과 카드나 치며 시간을 보내던 에드가 드디어 무기력한 자신을 뒤로 한 채 무기력한 이웃들에게 관심을 갖는 선택받은 자의 역할을 떠안게 된 것이다.
“... 왜 세상이 못 듣는 거지? ... 관심이 없기 때문이야... 뭘 하라고 선택을 받아? ... 관심을 가지라고.”
그렇게 에드는 자신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를 해석하고, 그 메시지를 당사자에게 전달하며 동시에 메시지가 요구하는 변화를 직접 시행하는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묵묵히(는 아니다. 제대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면 린치를 당하기도 하니까) 수행한다. 매 맞는 아내를 구하고, 헝클어진 형제애를 다독이며, 소외받은 이웃들을 성당으로 모으고, 묵묵히 트렉을 달리는 소녀를 응원하는 것이다.
“내가 그런 건 네가 평범함의 전형이기 때문이야... 너 같은 녀석이 일어서서 그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할 수 있을 거 아냐. 모두가 자신의 능력 이상의 일을 하며 살 수 있을 거 아냐...”
그리고 결국 이 모든 메시지가 허약하기 그지없고 무력하기 그지없는 에드라는 소설 속 인물을 통해 구현됨으로써, 움직이지 않는 우리들 모두는 약간의 힐난을 감수해야 한다. 에드처럼 별볼일 없는 청년이 할 수 있는 것을 왜 당신은 하지 못하는 것이지, 하며 부추기는 것이다. 작가의 또다른 작품인 <책도둑>과 마찬가지로 나름 계몽적이면서 조금은 밋밋하기도 하지만, 우리들 삶의 핵심을 비껴가지 않는 작가의 관심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꽤 유효해 보인다.
마커스 주삭 / 정영목 역 / 메신저 (The Massenger) / 문학동네 / 475쪽 /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