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해의 시간과 장소에서도 어떻게든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사실만이 진리.
소설을 읽기에 앞서, 비록 스포일러라고 할지라도 시뮬레이션 이론(한자어로는 모의실험가설)에 대해 알면 좋겠다. 시뮬레이션 이론은 ‘인류가 생활하고 있는 이 세계는 모두 모의 현실일 수 있다는 가설’을 의미한다. 사실 영화 <매트릭스>의 가짜 세계와 무엇이 다르냐 싶지만 그 세계의 크기에서 차이를 보인다. ‘매트릭스’가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면 ‘시뮬레이션 이론’은 전우주를 대상으로 한다.
“······갑자기 눈이 멀거나 일식이 일어나는 듯한, 번쩍 하는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에드윈은 기차역이나 대성당 같은 거대한 건물 안에 들어간 듯한 인상을 받는다. 바이올린 음악이 들린다.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런 뒤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p.48)
소설은 몇 개의 시간대를 오고가며 진행된다. 그 시간대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고 그들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1912년의 에드윈 세인트앤드루, 2020년의 미렐라와 빈센트, 2203년의 소설가 올리브, 2401년의 조이와 개스퍼리 등이다. 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시뮬레이션 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을 모르고, 이들 중 극소수만 자신들이 사실은 시물레이션 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 총을 든 남자는 진정제를 맞은 듯 졸린 표정이었다. 그의 고개가 앞으로 한두번 끄덕여졌다. 그런 뒤에 파랗고 빨간 경광등이 그를 휩쓸었다. 남자는 그 불빛에 정신을 차린 듯했다. 그는 자기 손에 들린 총을 빤히 봤다. 어쩌다 총이 거기에 와 있는지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그는 고개를 돌려 소녀들을 똑바로 바라봤다.” (pp.86~87)
그들 중 일부는 시물레이션 된 세상에 생긴 균열의 순간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험하고, 미래의 누군가에 의하여 그 순간은 구체화된다. 소설은 꽤나 서정적이게 시작되지만 느닷없이 SF 장르로 날아간다. 그렇게 소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그리고 지구와 지구 바깥을 넘나들고 그 궤적은 광대하다. 잘못 날아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감 속에서, 그 속도감 속에서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나한테 설명해 줄 수 있어?”... “시뮬레이션 이론? 그래.” ... “지난 몇 년 사이에 홀로그램과 가상 현실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생각해 봐. 지금 우리가 현실에 관한 상당히 설득력 있는 시뮬레이션을 가동할 수 있다면, 1백 년이나 2백 년쯤 지났을 때는 그런 시뮬레이션이 어떤 수준일지 생각해 보라고. 시뮬레이션 이론을 통해 우리는 모든 현실이 시뮬레이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어.” ... “ 그래. 하지만 우리가 컴퓨터 안에 살고 있는 거라면, 그건 누구의 컴퓨터일까?” ... “누가 알겠어? 수백 년 뒤 미래의 인간일까? 외계의 지성일까? 주류 이론은 아니지만 시간 연구소에서는 때때로 나오는 얘기야.”』 (p.162
읽다보면 영화 <매트릭스> 보다는 이현세의 만화(<아마게돈>이던가...)의 한 장면이 더 떠오른다. 그러니까 이 우주의 모든 설정은 신이 두는 장기판의 내용에 불과하다, 뭐 이런 내용이었는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소설 속의 세상은 일종의 모의 실험에 불과하고, 그 세상을 살아가고 이어가는 인류 또한 그 모의 실험에 속한 하나의 실험 대상에 불과하다는 설정이 만화 속의 장면에 비견된다.
“... 그러니까 오염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생각해 보세요. 시간상의 순간들은 서로를 오염할 수 있습니다. 혼란이 벌어진 건 사실이지만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당신은 그저 그 혼란을 목격한 사람인 거죠. 과거에 당신은 제 조사에 도움을 주셨고, 전 현재 당신이 다소 민감한 상태라고 봐요. 그래서 당신이 생각보다 덜 미쳤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당신 마음이 편해지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최소한 그 순간에는 환각을 본 게 아닙니다. 시간상의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한 순간을 경험한 거예요.” (p.316)
사실 시뮬레이션 이론(우주론)의 등장은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해석 불가능하고, 그것을 우주로까지 넓혀 보자면 이해 불가능의 영역도 무한히 확대되니, (현존하는) 인류의 이해와 해석의 범위를 벗어난 시간과 장소를 향하여 들이댈 수 있는 선택의 여지 없는 이론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는 그 불가해의 시간과 장소에서도 어떻게든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사실일 따름이다.
“... 우리가 시뮬레이션 안에 살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났을 때 그 소식에 대한 알맞은 반응은,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것. 시뮬레이션 안에 산대도 삶은 삶이다.” (p.347)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Emily St.John Mandel / 강동혁 역 / 고요의 바다에서 (Sea of Tranquility) / 371쪽 / 열린책들 / 2024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