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한 자와 창조된 것 사이의 복잡다단한 역전의 관계...
소설을 쓰는 틈틈이 영화 시나리오를 쓰거나 (<챈스>, <스모크>, <블루 인더 페이스>, <다리 위의 룰루>, <센터 오브 월드>, <이너 라이프 어브 마틴 프로스트>) 또는 그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드는 일까지도 ( <블루 인더 페이스>, <다리 위의 룰루>, <이너 라이프 오브 마틴 프로스트>) 하고 있는, 텍스트 멀티 플레이어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폴 오스터의 시나리오다.
이야기로서의 재미도 충분히 주면서 동시에 철학적인 뉘앙스도 깊게 배어 있는 폴 오스터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영화화 되어서도) 승산이 있었을 작품으로, 2007년 제작되었지만 아직 우리 나라에는 개봉 전이다. 액자 소설이라기 보다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 라는 틀을 가지고 있는 시나리오는 종종 폴 오스터스러운 위트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소설가라는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자신의 메인 잡에 대한 은유를 포함하고 있다. (이를 영화로 표현한 가장 적극적인 예는 <어댑테이션>이 있지 않을까.)
『마틴 : (마룻바닥을 내려다보며) 독서는 건강에 좋지 않아요.
클레어 : 콜레스테롤이 많은 책들만 그렇죠. 난 저지방에 채식 위주의 독서를 해요.
마틴 : 전공이 뭐요? 삶은 순무의 역사?』
영화는 어느 날 마틴이라는 소설가가 여행을 떠난 친구의 집에 글을 쓰기 위하여 들렀다가, 깨어보니 클레어라는 이름의 여자를 만나는 것으로 서두를 장식한다. 비어 있는 집에서의 창작 활동, 그리고 갑작스레 나타난 미모의 여인, 그 여인과의 꿈결같은 섹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 클레어를 향한 이 남자 마틴의 끌림 강한 사랑 이야기로 시나리오는 진행된다.
『클레어 : 그들이 나를 다시 불렀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당신이 옆에 있었으면 그들은 날 맘대로 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때 당신은 멀리 가버렸고, 난 그 순간 다시 잡혀 버린 거예요.
마틴 : 하지만 우리는 마법을 깨뜨렸어. 내가 당신을 다시 살려냈잖소. 난 당신이 한번 풀려나면 영원이 자유로워질 거라고 생각했소.
클레어 :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틀렸어요.』
하지만 비어 있는 집에서 우연히 조우하게 된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가, 라는 관심은 곧 코웃음 속에 사리지게 되고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이 여인 클레어의 나타남에는 마틴이라는 이 남자의 소설 쓰기가 강력한 매개체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마틴은 클레어에 대한 사랑을 거둘 수가 없다.
『마틴 (화면 밖 소리) : 난 아직도 내가 왜 당신을 볼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어.
클레어 (화면 밖 소리) : 내가 당신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마틴. 다른 사람 그 누구도 아닌 당신에게. (사이) 지금 나는 여기와 저기 사이에 갇혀 있어요. 그들 말로는 이 상태가 1년 동안 지속될 거래요.』
비어 있는 집의 마틴과 클레어,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관계를 그대로 빼어 닮은 포르투나토라는 배관공이자 아마추어 작가와 그 앞에 갑작스레 나타난 먼 조가뻘이라는 노래하는 안나를 통해 이야기는 점점 미궁으로 빠지고, 바로 그 미궁으로 내딛는 발걸음을 통하여 이야기 속으로 빠져 나오는 준비 작업을 착착 진행해간다.
“모든 이야기는 어떤 모습을 가진다... 그리고 그 모습들은 어떤 이야기든... 다른 모든 이야기의 모습과 다르다.”
‘모든 이야기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 이야기들은 언제든 ‘다른 모든 이야기의 모습’과 다르다는 영화 속 나레이터처럼 시나리오는, 저기 오비디우스 속의 조각가 피그말리온과 여인상 갈라테이아 (아니면 영화 <마네킹>?), 혹은 가장 최근에 읽은 조너선 캐럴의 소설 <웃음의 나라> 속의 작가 마셜 프랜스와 게일런의 주민들과 닮아 있으면서도 또 다른 모습을 띤다. 창조한 자의 상상을 뛰어넘어 현실로 뛰쳐나오고, 그리고 반대로 창조된 대상이 창조한 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율배반이 영화 속에서는 어떻게 보여지는지 조금, 궁금하다.
폴 오스터 / 김경식 역 / 마틴 프로스트의 내면의 삶 (The Inner Life of Martin Frost) / 열린책들 / 175쪽 / 2008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