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라는 오브제를 대하는 쓰는 자의 태도란...
나의 소망 중 하나는 하루에 세 번이나 네 번 정도 일기를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눈을 뜨면 세면을 마친 다음 운동을 한다. 이후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근을 하기 전에 그날의 첫 번째 일기를 쓴다. 나는 작은 서점을 운영하게 될 것인데 서점의 안과 밖을 청소하면서 손님 맞을 채비를 한 다음, 서점 안에서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두 번째 일기를 쓸 것이다.
“모든 순간을 기록하려 했지만, 시간은 순간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순간을 포함하고 있다. 시간은 순간 말고도 많은 것을 담고 있다. // 그래서 나는 텅빈 시간처럼 보이는 순간에 주의를 기울이려 애썼다. 내 작문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20분, 30분, 40분 동안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한 다음, 거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시간에 관한 글을 쓰게 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직전의 시간에 관한 글을 그 시간 직후에 다 같이 읽으려고 항상 교실과 복사실을 달음질로 오갔다.” (p.9)
저녁이 되면 서점은 다른 사람에게 인계되어 운영될 것이고 나는 퇴근을 하여 아내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할 것이다. 저녁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세 번째 일기를 쓸 것인데 이 세 번째 일기는 주로 몸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으로 제한하고 싶다. 저녁 운동을 마치고 나면 집으로 돌아와 먼저 영상 매체를 그 다음에는 인쇄 매체를 보고, 그 날의 마지막 일기를 작성한 다음 잠자리에 들 것이다.
“2000년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나는 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었다. 1996년에는 중요한 일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아서 그해 일기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 고등학생 시절에 쓴 일기장은 이미 갈가리 찢어버렸다. 다른 사람이 못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일만 기억하고, 그 일이 전부였다는 확신을 품고 싶다.” (p.25)
어려서 작성한 몇 권의 일기 노트가 있었는데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분실되기도 하였고 부러 버리기도 하였다. 오 년 전이던가 마지막 이사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일기 노트를 버렸다. 거기에는 대학 일학년 겨울 방학에 계룡산과 서해를 돌아 서울로 돌아오는 4박 5일(맞나 모르겠다)의 여정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고 그날 마신 술의 종류와 양이 일기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내게는 아무런 생각도, 어떤 자의식도 없었고, 다만 소리를 빽빽 지르고 또 소리를 빽빽 지르는 자그마한 생명체와 앉아 있을 수 있는 능력만 생겼다... 한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다음에는 스물한 살, 스물두 살···. 그러다 엄마가 되었고, 그러고 나니 스물하나와 스물둘의 차이라든가 서른여덟과 서른아홉의 차이조차 더는 분간하지 못하게 됐다.” (pp.62~63)
노트는 모두 사라졌지만 지금 사용하고 있는 노트북에 2015년부터의 일기 파일이 저장되어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의 일기는 데스크탑의 하드 드라이브에 저장되어 있는데 들여다본 지 오래 되었다. 1990년대의 일기에는 보다 신변잡기인 그리고 은밀하며 때로 추상적인 내용들이 들어 있을 텐데, 그래서 먼지 쌓인 하드 드라이브를 구동시키고 다른 곳으로 옮겨볼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지금 나는 일기가 내가 잊은 순간의 모음집이라고, 내가 끝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언어가 끝낼 수도 있는 기록이라고, 말하자면 불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언젠가는 내가 잊은 몇몇 순간들, 내가 스스로 잊어도 된다고 허락한 순간들, 내 뇌가 애초에 잊을 수밖에 없는 순간들, 내가 기꺼이 잊고 또 쓰기를 통해 기꺼이 되살려낸 순간들을 일기 속에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경험은 더 이상 경험이 아니다. 경험은 쓰기다. 나는 여전히 쓰고 있다. //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잊고 있다. 이제 내 목표는 모든 것을 잊고 말끔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저 사랑에 관한 아주 애매모호한 기억만, 내가 위대한 결속의 주체였던 순간에 대한 기억만 간직한 채로.” (p.96)
세라 망구소의 《망각 일기》의 초반부는 일기라는 오브제의 개념화와 일기를 쓰는 행위에 대한 탐구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어 제목에 있는 ‘일기’와 맞장구를 치는 부분이다. 그런가하면 책의 중반 이후는 여성인 작가가 겪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진다. 사실 그 기간 작가는 일기는 물론이려니와 모든 쓰는 행위로부터 멀어지고 마는데, 어쩌면 그 부분이 한국어 제목 ‘망각’에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라 망구소 Sarah Manguso / 양미래 역 / 망각 일기 (Ongoingness : The End of a Diary) / 필로우 / 111쪽 / 2022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