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Nov 18. 2024

한유주 《달로》

이야기가 사라진 현재를 이야기하는 한유주의 방식...

  이 작가의 문장, 참 경이롭다. 김애란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읽는 사람이 혀를 내두르도록 만든다. 꼼꼼하고 촘촘하기가 뜨개질을 넘어 어디 아랍의 카펫과 같다고나 할까. 김애란의 위트 만점 문장이 성석제를 닮아 있다면, 이 한유주의 문장은 정영문이나 정찬 혹은 이인성의 문장을 닮아 있지 않나 싶다. 물론 걸어가는 길이 그러하니 이 작가의 소설을 읽기 위해선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처음 이 소설의 책을 산 것은 꽤 오래 전이지만 너무 더디 익다가 책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또 책을 샀다. 그렇게 두 번째 산 책 또한 오랜 시간 읽었는데, 그러고 나서도 이렇게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정리한다.)


  「달로」.

  “... 슬픈 일들이 무수히 일어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슬픔은 고개를 떨어뜨렸고, 일들, 은 세탁된 빨래처럼 곳곳에 가볍게 널렸다. 누구나 단 불로 삶은 빨래 같은 생활을 갖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런 청정한 일상의 뒷면에서는 아무도 바다를 찾을 수 없었고, 아무도 바다를 찾지 않았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이야기꾼들은 점점 힘겨워지고 있는 중이다. 이야기를 건너뛴 채 무작정 현재로만 달려들려는 우리들을 향하여 작가는, 그 언젠가 우리들에게 이야기가 제 역할을 하던 때를 향하여, 그 달로, 혹은 그 달을 향한 그리움을 설파한다. “... 사람들을 매혹시킨 가장 오래된 이야기였던 달은 강의 어느 저편에 흐린 얼굴로 잠겨 있었다. 달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먼 옛날이야기로,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최초의 순간들을 문득 저릿하게 그리워하기도 했다...”


  「죽음의 푸가」.

  “지구는 하나의 푸른 공이었다. 무료한 시간이면 신들은 지구를 굴리면서 공놀이를 했다. 신들은 언제나 무수히 많은 희생양들을 요구했다. 공이 던져질 때마다 죽음의 자비로운 시건이 집요하게, 공의 궤적을 좇았고, 등 뒤로 감춘 천 개의 손을 침착하게 달각이고는 했다...”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문득 우리들을 향해 촉수를 뻗는 죽음을 향하여 촉수를 뻗는 작가의 문장들이 끈덕지다. 어림짐작 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 인간의 잘못이 은근슬쩍 신의 손장난에 떠넘겨지기는 하지만...


  「세이렌99」.

  “... 나는 세이렌의 영역을 통과하게 될 것입니다... 분류 기호 99로 불렸던 내 파일에는 미치거나 사라진 내가 갇혀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일까요? ... 이야기는 모두 증발했습니다. 이야기는 모두 미치거나 혹은 사라졌습니다...” 함께 훈련을 받았우나 세이렌의 영역을 통과한 이후 모두들 사라져버린 사람처럼 분류 기호 99의 나 또한 그렇게 사라질 것인가...


  「그리고 음악」.

  “... 우리는 읽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와 환영의 세계는 점차 좁다란 페이지들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것이 우리의 전부였다. 아니다, 그리고 음악.” 읽기를 포기하고 듣기만을 고집한 환영, 마치 환영처럼 읽히기를 거부했던 인간 환영을 향한 나의, 일종의 연대감을 기록한 짧은 연대기...


  「베를린·북극·꿈」.

  “... 언제나 전쟁은 잘못된 전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어제, 사람들은 자신 안에 전쟁터를 일군다. 오늘, 그 모든 전쟁들은 바깥으로 터져나온다. 내일, 크고 작은, 모든 전쟁들은, 마침내 하나의 전쟁이 된다. 전쟁은 계속되며,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베를린에 들어선 여행자,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따라 무한 확장하는 여행자의 시선을 따라가는 일은 힘겹다.


  「죽음에 이르는 병」.

    “이것은 나의 마지막 이야기다. 나의 마지막 비밀 이야기다. 이제 막 끝난 것 같은 삶과, 이제 막 시작한 것 같은 삶 사이에서, 나는 혼란스럽다. 내 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은 라스콜리니코프와 포르피리, 전당포 노파와 리자베타와 소냐이므로, 내 안에는 죄인과 검사와 변호사와, 황폐한 영혼과 천사가, 이미 살고 있다...” 농담처럼 무수한 말을 쏟아내는 나의 옆에는 선로에 뛰어들어 죽음에 이른 환희가 있다. 무수한 말들 속에서 스스로 갈피를 찾을 수 없는 그곳에 야유를 보내고 있는 듯한 내가 있다.


  「지옥은 어디일까」.

  “희고 말갛고 고운 햇살은 너무나 다사로웠으므로 금방이라도 모든 거짓말들이 발각될 것처럼 보였으나, 그래서 오히려 햇빛 스스로가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처럼 보였고, 그러므로 사람들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고, 나조차도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종교적인 너무나 종교적인...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신비를 부여하는 대신, 바로 그것들에서 신비로움을 빼앗아 종교의 빈 방안으로 밀어 넣어버리는 것만 같다.


  「암송」.

  “... 자신만의 음악을 입 안에 단단히 매어두는 그때. 사람들은 손바닥을 세게 누르며 생각한다. 사람들은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독백들이 움튼다. 말하고 싶다, 말하고 싶다, 말하고 싶다. 입 속의 세 치 뼈, 한 덩어리의 혀가 감추고 있는 유령과도 같은 기억, 기억들...” 모든 사람들이 모든 상황에서 갈구하는 음악들, 우리들의 뼈과 살이자 피이기도 한 음악들, 우리들 모든 이야기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유령처럼 우리들의 모든 곳에 존재하는 음악들, 은 말하고 싶어하는 우리들을 대신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일까.


  이야기가 사라진 현재를 이야기하는 방식을 찾아라, 라는 명령문을 받아서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작가를 보는 것만 같다. 어떤 식으로도 요약이 불가하고, 시작과 끝이라는 단어로 지칭되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기로 작정한 작가의 소설을 읽는 일은 쉽지 않을뿐더러 그 쉽지 않음이 기이하기도 하여 불쾌한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 정도이다. 작가의 절묘한 문장이 적절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달로 / 한유주 / 문학과지성사 / 246쪽 / 2008 (200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