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 날아갈 듯 근거 빈약한 이들의 불꺼진 삶...
도통 계간지를 보지 않으니 새로운 작가들의 새로운 글들을 접하지 못한 채 넘어가는 시간들이 많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신문이나 문학지를 통해 등단하고 계간지를 통해 짧은 소설들을 발표하며 내공을 쌓고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일 무렵 소설집을 내고 다시 중단편 소설을 쓰거나 장편 소설을 써내는 일련의 도식화된 과정을 거치고 있으니 계간지를 읽지 않으면 (어느 정도 성장하기 전까지의) 신진 작가들의 면면을 살필 기회가 마땅치 않게 된다.
「천사들의 도시」.
문예중앙으로 등장한 작가이니 일단 문장력만큼은 꽤 탄탄하다. “... 새벽 거리 곳곳에선 사람들이 벗어 놓은 그림자들이 은밀하게 숨어 우리를 지켜본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바짝 말라 버렸을 그림자들은 주차된 차들의 밑, 맨홀이나 하수구 아래, 혹은 담벼락이나 가로수 뒤에서 하루 동안의 피곤한 하루 동안의 외로움을 위로받고 있었을 터였다...” 입양되어 간 곳으로부터 다시 한국으로 건너온 너, 그리고 이러한 너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교사로 앞에 섰던 나... 친부모를 찾는다는 식의 미디어스러운 목표도 없이 그저 한국에 잠깐 들렀다가 이제 천사들의 도시가 있는 미국으로 떠날 작정이라는 너와 나눈 나의 짧고 사막처럼 메마른 만남의 기록...
「그리고, 일주일」.
에이즈 검사가 양성으로 나오고 난 후 일주일의 기록이다. “... 사람이 이전에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 내는 힘은, 상처 이후가 아니라 상처의 시간을 견뎌 낼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난 후에야 습득된다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일사분란하게 최악인 아버지의 히스토리, 그리고 4년 전 내가 독일에서 겪었던 한 번의 낯선 섹스와 뉴스 진행자인 L을 향한 나의 집요한 사랑 이야기...
「인터뷰」.
우리의 근대사 한 켠을 장식하는 중앙아시아의 선조들... 뿌리로부터 조금씩 뻗어나가 이제 겨우 열매를 맺을라치면 툭툭 끊기는 그 가지들에서 마찬가지로 떨어져나온 우즈베키스탄의 그녀는 이제 한국으로 넘어와 어느 가구 대리점의 한 구석에서 한국인 남편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아버지는 틀렸어요. 그들의 말을 사용하고 그들의 음식을 먹고 그들의 사고로 산다고 해서 우리가 우즈베키스탄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걸... 한국 남자와 결혼한다고 해서 한국인이 되는 건 아니란 걸 나도 몰랐으니까요...”
「지워진 그림자」.
자신의 존재를 지워야 했고, 이제 도심의 빌딩들 그 옥상을 옮겨 다니며 기식을 해야 하는 신세의 한 남자의 이야기... “... 골목에는 마침 한 줌의 바람, 먼 우주를 돌다 온 휘파람이 분다. 남자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목과 등을, 허리와 다리를 만져 본다. 잠시 후 남자의 손안에 남은 건 새벽바람뿐, 남자의 몸을 기억하는 감촉은 어디에도 없었다.”
「등 뒤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동생들을 다시 만난 건 어머니가 지병인 폐암으로 눈을 감은 직후였다. 영안실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속삭이며 소리 낮춰 웃고 있던 두 소녀가 동생들이란 걸, 열 여섯 살의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날 이후부터 그녀의 등 뒤를 서성이던 소녀들은 그녀와 함께 나이를 먹어 갔다...” 등 뒤에 있는 어린 시절에 죽은 동생들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M, 학교 선생님은 M을 열렬히 추종하는 왕따 여학생인 N, M의 집을 방문하는 헌병 시절 미결수를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매일 같은 꿈을 반복하는 S의 이야기...
「기념사진」.
(아마도) <잘 자요, 엄마> 라는 연극을 절찬리에 공연하다 쓰러진 이후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고 이제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 “... 어두워지고 좁아지는 건 시야만이 아니었다. 여자가 30년 동안 쌓아 온 모든 관계와 그 관계를 지탱해 주었던 믿음도 원래의 컬러와 깊이를 잃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던 나의 무대들…….” 그리고 이 여자와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오래전 잘못된 목격자로 인하여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나온 후 불륜 포착 사진가로 살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 이들에게 웃음처럼 맑은 희망은 있는 것일까...
「여자에게 길을 묻다」.
대추나무집이라고 불리는 수색의 집에 살고 있는 여자, 그리고 그 여자를 찾아오는 또다른 여자, 이 두 여자의 여행의 기록이자 두 여자의 삶의 흔적에 대한 기록이기도 한 이야기... “어느덧 감긴 눈에도, 뜨거운 수액(樹液)이 차오르기 시작했다.”라는 마지막 문장처럼 동물처럼 헐떡거리면서도 끝끝내 식물처럼 정적이기만 했던 삶의 기록...
날렵하고 선선한 문장들을 구사하면서도 전달하는 바는 꽤 몽롱하다. 사회적 약자라기 보다는 삶의 낙오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해 보이는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막바지에 다다른 자신을 근근이 견뎌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이입이 쉽지 않은 탓이다. 스산하기 그지없고 크게 한숨만 뱉어도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그들의 인생을 바라보는 일이 사실 마땅치 않다. 물기 찾아보기 힘든 버석함으로 흥건한 이 아이러니라니...
조해진 / 천사들의 도시 / 민음사 / 255쪽 /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