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깊은 주름으로 스며드는 늙은 소의 워낭소리...
*2009년 1월 27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지난 주부터 딸랑거리는 워낭 (마소의 귀에서 턱 밑으로 늘여 단 방울) 소리마냥 워낭소리, 워낭소리 입에 달고 사는 아내의 등쌀에 늦은 저녁 강남의 극장 나들이에 나섰다. 본가와 처가를 다녀오고, 청소에 빨래까지 모두 마쳤으니 피곤도 할법한데 다 늦은 저녁에 예매를 했다는 소리에 오히려 반색을 한다. 그래 가자, 다 늙은 소도 주인의 말에 따라 나뭇짐을 나르는데, 젊디 젊은 (이라기엔 좀 뭣하지만 영화 속 소와 비슷한 나이의) 남편이 아내의 말에 따르지 못할 것은 또 무어냐...
그리 길지 않은 다큐멘터리 <워낭소리>는 칠순을 훌쩍 넘긴 노부부와 한 마리의 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특히 어린 시절 다쳐서 제대로 움직거리기 힘든 한 쪽 다리로 평생 게으름 한 번 피우지 않고 농사를 지어온 할아버지와 열 살 남짓해서 이 할아버지와 만나 사십 살이 된 지금까지도 묵묵히 달구지를 끌고 쟁기를 끄는 늙은 소는 별다른 대사 한 마디 하지 않으면서도 (소야 그렇다치고 이 무뚝뚝한 할아버지라니) 훌륭하게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역할을 해낸다. 여기에 감초처럼 끊임없이 할아버지를 향해 소를 향해 넉두리를 늘어 놓는 할머니가 덧붙여지니 환상적인 궁합이라고나 할까.
(다큐멘터리라고는 하지만 아마도 약간의 연출이 가미된 듯한) 영화는 어느날 이 늙은 소가 갑자기 아파 수의사를 부르면서 시작된다. 소의 나이를 짐작하고 깜짝 놀란 수의사는 얼마나 더 살 수 있느냐는 할아버지의 질문에 오래 살아야 일년이라는 식으로 답하고, 소가 없으면 농사를 짓는 것은 물론이고 바깥 출입도 여의치 않은 할아버지는 큰 한숨을 짓는다.
하지만 죽을 때는 죽더라도 하루라도 들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줄로 아는 할아버지는 또다시 이 늙은 소에게 달구지를 끌게 하고 집을 나선다. 못쓰게 된 다리로 무릎을 꿇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흙을 덮는 할아버지를 늙은 소는 멀찍이서 지켜보고, 할아버지가 베어다주는 꼴을 열심히 먹던 늙은 소는 일 끝낸 할아버지를 태우고 오르막의 끄트머리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매일의 일상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던 집에 새끼를 밴 젊은 소가 들어오고, 그 소가 새끼를 낳고, 이제 늙은 소는 자신의 집까지 내어주고 마당 한 켠으로 거처를 옮기는 지경에 이른다. 비가 오면 그 비를 피하지 않고 맞으며, 새끼 소가 장난을 걸고 개집 옆의 개가 컹컹 거려도 그저 노쇠한 울음 소리를 보내거나 바람결인 뜻 딸랑거리는 워낭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늙은 소는 힘겹게 힘겹게 제 마지막을 향한다.
영화 상영 내내 별다른 사건 없는 농촌의 (여느 농촌보다도 훨씬 한갓진 봄 여름 가을 겨울인) 하루하루가 전개되지만 보는 이의 마음은 자꾸 울렁거린다. 덕지덕지 진흙 더깨가 늘어 붙어 있는 소의 야위디 야윈 몸뚱이가 끊임없이 눈에 밟히고, 아홉 남매를 키워낸 소가 끄는 달구지에 노쇠한 몸뚱이를 누인 채 ‘아이, 아파’를 연발하는 할아버지의 알아 듣기 힘든 혼잣말이 귀에 밟힌다. 쇠락해가는 것들의 연합체이기도 한 이 할아버지의 주름과 늙은 소의 굽은 다리는 그렇게 우리들 삶의 집약인 것처럼 우리들 죽음의 시그널인 것처럼 존재한다.
그리고 영화의 끄트머리 결국 달구지를 끌 힘조차 남지 않은 듯한 늙은 소에게 마지막 여물을 먹이고 우시장으로 끌고 나가는 날, 그렇게 팔아치우라 외치고 또 외치던 할머니조차 눈시울을 늙은 손으로 훔쳐내지만 결국 우시장에서조차 버림받은 늙은 소는 다시금 노부부의 집으로 돌아오고, 그렇게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노부부의 겨울을 지켜줄 나뭇단을 마당 가득히 실어 놓는 것으로 제 마지막 할 일을 다하고 드디어 제 생애 내내 자신을 옥죄던 코뚜레로부터 해방되며 마지막 숨결을 내려 놓는다.
소의 평균 수명이 십오 년이라는 점에 비춰봤을 때 미스터리하기까지 한 이 늙은 소의 사십 년이 스러지고 나서 이제 그 소의 턱 밑에 달려 있던 워낭을 손에 든 채 소가 묻힌 들판에 홀로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화면으로 확인하는 순간 우리들은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는 감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타고난 에너지를 아낌 없이 할아버지와 땅에게 퍼부은 늙은 소가 남긴 워낭은 아직 남아 딸랑거리고, 그 소리는 깊게 패인 할아버지의 주름 사이사이로 고즈넉하게 스며든다. 삶과 죽음에 관하여 아낌없는 시선을 보내는, 지극한 쓸쓸함으로 오히려 아름다워지는 영화이다.
워낭소리 / 이충렬 감독 / 최원균, 이삼순 출연 / 78분 / 2009 (2008)
ps.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아내의 반응은 예상외로 꽤나 격렬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소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안타까와했던 아내는 할아버지를 향해 격한 감정을 영화가 끝나가 격하게 토해냈다. 조금이라도 약한 것에 스스로를 감정 이입시키는 천성을 가지고 있는 아내에게는, 불쌍한 소를 마지막까지 부려먹은 못된 늙은이와 이런 늙은이의 괴롭힘에도 반항 한 번 할 수 없었던 가여운 소의 이야기가 다른 모든 것에 앞선 탓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