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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Nov 24. 2024

정미경 《내 아들의 연인》

책을 덮어도 강한 염력을 뿜어내는 이미지의 신묘함...

  책을 읽는 동안 이 작가의 문장이 묘하게 마음에 착착 감긴다고 생각했다. 몇 년전에 읽은 이 작가의 장편 소설을 읽으면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인데, 작가의 중편 혹은 단편 소설은 장편 소설과는 조금 다른 것도 같다. 이런 작가라면 장편보다는 중단편을 위주로 읽는 것이 낫다. 여하튼 작가가 구사하는 문장들은 아주 적당한만큼 숙성되어 있어서 바로 지금 맛봐 주어야 할 것만 같다. 

 

  「너를 사랑해」. 

  “... 칠 년이란 세월은 과연 한 인간을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데 충분한 시간일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화나 때나 즐거울 때나 건강할 때나 배탈이 났을 때마저도 늘 밥을 먹어치우는 Y를 보고 있으면 이 여자와는 싸우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렇게 현재진행형인지 과거완료형인지 모를 여자 Y를 내게 자금 관리를 맡기고 있는 영감에게 소개한다. 은근슬쩍 여자를 들이밀고 사실은 자기가 맡고 있는 계좌의 손실을 넘어가 보겠다는 나의 속셈은 (여기에 잘만하면 대학의 선생 자리 하나 꿰차기 위한 뒷돈을 마련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Y의 속셈이 합해져) 하지만, 영감이 Y에게 푹 빠지면서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이제 Y에게 말한다, 너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Y는 ‘볼에 눈물 한 방울’ 흘리면서도 평온해 보이는 얼굴로 말한다. “7월은 지나갔어. 우린 꽤나 멀리 왔어. 돌아서면, 그 순간 우린 둘 다 소금기둥이 되는 거야. 봐, 이렇게 비가 끊임없는데, 소금기둥이 되어 녹아내릴 일만 남는 거야. 지금은 돌아설 수가 없어. 돌아갈 곳은 다 무너져버렸고, 그냥, 앞만 보고 걸어야 되는 거야.”  

 

  「들소」. 

  “... 처음 명조와 자고 나서, 수혜는 관계를 원했던 건 자기가 더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섹스는 치명적인 친밀감을 단번에 만들어냈다. 명조는 오래된 친구가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이 되었다. 가끔 우리 둘은 어떤 사이일까, 생각해보곤 했다. 그건, 불륜이라기엔 너무 안정적인 관계였다. 하윤은 수혜의 손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명조는 그녀의 발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수혜의 내면에서 충돌하지 않았다...” 하윤과 명조 사이에 있었던 조각가 수혜는 하지만 하윤과 헤어질 것임을 통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윤이 죽음을 앞둔 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일년 전 하윤은 죽었고, 그 일년 후 수혜는 그전까지의 이쁘장한 조각들과는 전혀 다른 엄혹한 추위를 견뎌냈을 들소 조각으로 이루어진 전시회를 한다. 그리고 명조와의 해후... 빙하기로부터 멀리멀리 떨어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이지만, 우리는 때때로 자신도 모르는 저 먼 빙하기의 기억을 자신들의 감정 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바람결에」. 

  섹스는 없어진지 오래, 하지만 아이를 원했던 나와 영조는 끊임없이 난자와 정자를 제공하며 영조의 친구 동재를 통한 배양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너무 긴 시간이 흐른 뒤라고 여겨지는 지금, 동재에게서 마치 꽃잎과도 같은 어떤 생명의 아주 먼 시작을 렌즈로 들여다보게 된다. “여름저녁은 게으르다. 묽은 어둠 속에서 창틀의 제라늄 꽃이 요염하게 붉다. 강인하고 다산성인 저 꽃을 한 번도 예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까, 꽃이파리처럼 보인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보인다고 해도 그건, 식물성은 아닙니다.” 마치 꽃이파리처러 보이는 그것에서 우리들 동물성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작가는 위와 같은 문장의 조합으로 표현한다. 바람결에, 라는 제목도 참 좋구나... 

 

  「내 아들의 연인」. 

  “도란이는 내게, 어쩌면 한 권태로운 여행지에서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있다 우연히 찍게 된 유에프오 같은 존재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만나기 이전과 이후의 나는 달라져버린, 미확인 비행물체. 도란이와의 다정했던 시간도, 백미러의 파열음도, 언젠가는 오래 전 채집된 식물처럼 바스러질 것이다. 초핀과 내가 그날 느꼈던 몸의 열기가 이제 식물성으로만 기억되듯.” 아들 현이 사귀는 여자 친구 도란을 만나며 나는 옛시절을 떠올린다. 하지만... “뜨겁게 데워진 돌이 척추를 따라 하나씩 놓인다... 뜨거움은 곧 가시고 돌은 천천히 식어갈 것이다.” 

 

  「매미」. 

  “...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쓰러지는 사람과 귀 안과 바깥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견뎌내지 못하는 인간. 그런 둘이 롤러코스터라니.” 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남자는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이명을 견디지 못하여 병원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쌍둥이 자매의 죽음 이후 아무런 이유 없이 쓰러지는 병을 얻게 된 여자를 만난다. 그 둘은 그렇게 조금씩 섞여 들어가는 것만 같다. 하지만 어느 순간 또다른 사실이 그들 앞에서 더욱 환하게 또는 더욱 어둡게 모습을 드러낸다. 

 

  「시그널 레드」. 

  “귀대를 하는 날, 횡단보도 앞에서 붉은 신호등을 보며, 나는 눈을 몇 번이나 깜박였다. 신호등의 붉은색이 묽은 번트 시에나로 보였다... 내 시야에서 시그널 레드 빛깔이 사라진 것을 안 순간, 머릿속 어딘가에 경면주사 붉은 빛깔의 점이 비에 젖은 꽃잎처럼 착 들러붙었다.” 무대 연출자인 K는 시그널 레드에 대한 색맹이다. 나는 그런 K를 사랑하였다. 그에게서 듣게 된 새엄마와의 충격적인 정사는 사실인 것일까. 나와 헤어진 이후 K가 벌이던 정사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밤이여, 나뉘어라」. 

  “... 상상력에 관한 한 P를 대적할 인간은 없을 것이니. 오래 전, 상상력 따위는 손톱만큼도 허용될 것 같지 않은 외과수술실에서조차 늘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한 놈이니까...” 라이벌로조차 여기지 못할 정도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던 P는 외과의의 길에서 조금 물러나 지금은 러브피아, 라는 엉뚱한 신약을 개발중이다. 나 또한 의사의 길을 집어치우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고, 우연한 기회에 그가 있는 오슬로에 오게 된다. “나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슬로에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P는, 내 안의 불꽃이었다. 그가 사라지면, 나 역시 불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사그라지고 말 것을 나는 알고 있다. P를 모른다 한 것은, P를 잃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귀를 감싸며 혼자 중얼거린다... 나는 P를 만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고.”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그를 부인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고, 지나온 시간이 가지는 잔혹한 허망함 속에서 M의 벗어나고 싶어하는 절규만을 귀담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이 작가가 구사하는 이미지들이 마음에 든다. 작가가 뿜어내는 그 이미지의 향연은 책을 덮은 이후에도 강한 염력이 되어 잔상을 남긴다. 크고 깊은 메시지로 독자들을 크고 깊게 만들 수는 없을 지언정, 오래도록 어떤 여운에 시달리도록 만들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이 작가를 읽은 것이 하필이면 깊어가는 가을의 문지방, 바로 그 지점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미경 / 내 아들의 연인 / 문학동네 / 313쪽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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