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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Nov 29. 2024

이승우 《소설을 살다》

소설을 사는 소설가와 소설가를 읽는 독자와의 조우...

  한 해가 저무는 날 저녁에 아내와 나는 작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다음 해에 우리가 중점적으로 해야 할 구체적인 무언가를 결정하고는 한다. 지난해의 마지막 날 저녁에 아내는 내게 소설을 써보라고 했고, 내처 등단에 도전하라는 조금은 밑도 끝도 없는 주문을 하였는데, 어지간히 술이 들어간 후인, 해가 막 바뀌려는 참인 한밤중에 나는 덜컥 그 주문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는 2008년 상반기가 몽땅 지나가도록 마치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이런저런 글감들을 찾아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다.


  “글감을 찾는 과정은 뒤지는 과정이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들추는 것이 뒤지기다. ‘샅샅이’ 보다는 ‘낱낱이’가 더 어울린다... 소설을 쓰려면 먼저 수첩을 뒤져야 한다. 수첩에서 나오지 않은 소설은 거의 없다. 무언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 해놓은 내 모티브 수첩은 손바닥만 하다... 수첩은 늘 몸에 지니고 다닌다... 나는 신비주의자는 아니지만, 언제 그럴듯한 생각이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나도 작가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스치듯 지나가는 생각들을 붙잡아 두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다고 하는 (헤밍웨이나 빈센트 반 고호가 사용했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몰스킨 상표의 수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지는 못했다. 때로는 사무실의 서랍에 있다가 어느 때는 가방 안에, 그리고 다시 우리집 책상의 서랍으로 자리를 옮겨 다니는데, 수첩을 들여다보면 대략 직무유기 중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겠다.


  그러니 자기 전 무수히 떠올랐던 상념들은 해안에 부딪치며 파도처럼 흰 포말만을 남긴 채 사라지기 일쑤이고, 제대로 된 글감으로 자라나지 못할뿐더러 살을 붙이고 피를 돌려가며 성장 가능태로 자라나는데 연거푸 실패하고 만다. 머리를 쥐어 뜯지만 사라진 그것들을 되살려내지 못한 채, 몇몇 단어와 상황들만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을 따름이다.


  “씨앗이란 신기한 것이어서, 다 자랐을 때의 식물의 형태가 눈에 보이지 않은 채로 그 안에 들어 있다... 실한 씨앗이 다른 요인에 의해 부실한 나무로 자랄 수는 있지만, 부실한 씨앗이 실한 나무로 자라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발상의 중요함을 역설하는 데도 이 비유는 썩 유용하다.”


  본격적인 소설 창작론을 표방한 책은 아니지만 작가는 책속의 글들을 통하여 (자신이 직접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거니와) 틈틈이 소설의 창작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소양들을 설파한다. 현업작가이기도 한 저자는 (얼마나 불편했을까 싶은데도) 자신의 소설 창작 기간 중 직접 습득한 것으로 보아야 할 예를 들어가며 별다른 가감없이 우리에게 말한다.


  “... 존재에 대한 결핍감이야말로 욕망의 원천이다. 결핍이 클수록 욕망도 커진다. 결핍에 대한 감각이 예민한 사람일수록 욕망에 대해서도 예민해진다... 어떤 경우에도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모습을 바꿀 뿐이다. 현실 속에 자기 집을 짓지 못하거나 집을 지을 수 없게 된 사람은 허구 속에라도 자기 집을 지어야 한다... 희망이 없으므로 희망하는 것이다. 허구, 이야기, 그 이야기의 형식인 책들에 대한 탐닉, 일종의 허족虛足... 내 소설들은 일종의 허족인지 모른다.”


  책의 전반부인 <소설 안 - 소설 쓰기>라는 챕터가 자신의 창작물을 통한 소설 창작에의 비의를 설파하고 있다면, 책의 후반부인 <소설 밖 - 소설 읽기>라는 챕터는 작가에게 영향을 준 카프카, 막스 피카르트, 이스마일 카다레, 미셸 트루니에, 엔도 슈사쿠, 최승자, 알베르 카뮈, 앙드레 지드 등 작가와 작품을 거론하며 소설을 제대로 읽는 것 또한 소설을 제대로 쓰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지적한다. 


  “... 소설 쓰기는 도무지 형체가 잡히지 않는 세상살이에 대한 서툰 허우적거림이거나 가설假設 같은 것인지 모른다.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익숙해진 사람)이 소설을 쓸 까닭이 없는 이치다. 튼튼한 집을 이미 지어 가진 사람이 가설의 필요를 느낄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소설은 매번 새로 하는 질문이고 도달한다는 보장이 없는 낯선 길에 대한 추구다. 해답을 발견하는 순간, 문득 길이 낯익어지고 마침내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지점에서 소설은 끝난다...”


  책 한 권으로 소설이 간직한 전경이 모두 밝혀진다면 그것 또한 불경한 짓일 터이다. 그저 오랜 시간 소설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아 온 작가는 스스로의 작업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그러한 되돌아봄을 통하여 자신의 소설 작업의 시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이러한 되돌아봄과 확인의 시간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소설과 함께 한 많은 시간이 되살아나는 나와 같은 독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승우 / 소설을 살다 / 마음산책 / 247쪽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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