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 워터스 《핑거스미스》

19세기의 치명적인 매력이 21세기의 섬세한 세련미로 재현되다...

by 우주에부는바람

책을 읽는 일은 때때로 아슬아슬하다. 한꺼번에 많은 양의 책을 사고, 그 중 8-90% 정도를 선별하여 읽고, 나머지는 조금 뒤로 미루어 읽다보면, 한없이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기만 할 뿐 읽지 못하는 책들도 등장하고는 한다. 특히 두툼한 분량에 읽어도 읽어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은 앞 부분을 조금 읽다가 묻어두는 경우도 심심찮다. 어쩌면 세라 워터스의 이 소설이 그러한 운명이 되었을 수도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자연주의 문학을 빼닮은 소설은 현대소설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풍스럽다. 게다가 바로 그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삼아, 꼼꼼하기가 무슨 역사학자의 풍속 기술을 보는 것과도 같으니 자칫 두 손을 들어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손을 놓아버리면 두고두고 후회할 터... 1부 마지막에 도달하는 순간, 독자들은 심하게 뒤통수를 맞게 되고, 현대 소설이 구사하는 서스펜스의 새로운 진면모를 확인하게 되니, 지금이라도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이렇게 말해야겠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시라...

“우리는 비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진짜 비밀이었고 비열한 비밀이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밀이었다. 지금에 와서 나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던 사람은 누구이며,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은 누구이며, 모든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누구이며, 사기꾼은 누구인지 정리해 보려 하지만 결국은 포기하고 만다...”

소설은 영국의 런던, 자신의 불우한 태생에도 불구하고 뒷골목의 대모와도 같은 석스비 부인의 비호아래서 씩씩하게 살고 있는 수전 트린더를 주인공으로 삼아 전개된다. (수전 트린더가 알기로 그녀의 엄마는 살인을 저지른 후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장물아비인 입스씨를 비롯하여 소매치기(책의 제목인 핑거스미스는 이러한 소매치기를 일컫는 은어이다.)와 동네 양아치들로 이루어진 무리들 속에서 수전 트린더는 나름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젠틀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리버스 씨가 이들 소굴에 등장하여 수전 트린더에게 희대의 사기극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면서 소설은 급물살을 탄다. 희대의 사기극은 이렇다. 런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한 처녀가 삼촌의 감시 속에 살고 있다. 이 처녀는 거금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어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결혼을 해야만 한다. 러비스 씨는 모드 릴리 양과 결혼을 할 생각이고, 이러한 결혼 계획을 차질없이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수전 트린더가 하녀로 잠입하여 그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동안 자신을 위하여 헌신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은 석스비 부인을 위하여 (도둑의 소굴과도 같은 그곳에서도 수전 트린더는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그동안 그나마 곱게 자랄 수 있었다) 수전 트린더는 한건 크게 올릴 수 있는 이 사기극에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모드 릴리의 하녀가 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이 모드 릴리양의 캐릭터가 또한 흥미롭다. 어미를 교수형으로 잃은 수전이 있다면, 모드 릴리의 엄마는 정신병원에서 모드 릴리를 낳았고, 엄마가 죽은 후 모드 릴리는 삼촌에 의해 수집(?)되어, 삼촌의 작업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자라왔다. (지금으로 치자면 모드 릴리의 삼촌은 음란서적의 수집가이며, 음란서적에 관한 백과사전을 저술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자이다.)

“세상은 그걸 쾌락이라 부른다. 삼촌은 그걸 수집한다. 철저히 보호되는 서가에 깨끗이 보관하고, 순서대로 정리한다. 그러나 그 보관이란 것이 매우 묘하다. 책을 위해 책을 갖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보다는, 기묘한 탐욕의 충족을 위한 연료를 제공하기 때문에 보관한다.”

그리고 이제 수전과 모드, 상대방을 향하여 서로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던 두 여자는 어느 순간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로를 향하여 끌리는 마음을 알아채고 당황하기 시작한다. 바깥 세상과 완전히 차단되어 생활해온 모드를 수전은 동정하고, 도시에서의 자유분방한 생활 내음을 고스란히 간직한 수전을 모드는 동경한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하여 강한 끌림을 느끼게 된다.

“... 우린 단지 이런 고립된 장소에 너무나 오랫동안 같이 있던 것뿐이다.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수는 너무나 솔직하고, 너무나 풀어져 있고, 너무나 자유롭다. 수는 하품하고, 기댄다. 여기저기에 스치고, 까인다...”

700쪽을 넘는 소설의 앞 부분을 요약하는 것조차 힘에 부친다. 게다가 소설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섬세하다못해 지루할 정도의 풍경 묘사들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그 시대의 공간을 눈에 그려보는 사이에, 주관적이다못해 등장인물의 혈류 흐르는 모양까지 보이는 듯한 심리 묘사들을 바라보며 감정이입이 되는 사이에 소설은 격류가 되고 폭포수가 된다.

“그 시절, 내 이름은 수전 트린더였다. 이제 그 시절은 모두 끝이 났다.”

그렇게 활자들 사이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바빠진 호흡은 어느 순간 잦아든다. 수전 트린더와 모드 릴리, 그리고 석스비 부인으로 연결되는 사건의 소용돌이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대륙의 돌풍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한바탕의 소란으로 난장판이 되어버린 공간 혹은 사람들의 풍광이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남겨지고, 독자들은 등장인물들만큼이나 공황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황이 전혀 싫지 않다. 끈질기고 은밀하면서 갑작스럽고 섬세한 소설을 읽으면 작가의 다른 작품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세라 워터스 / 최용준 역 / 핑거스미스 (Fingersmith) / 열린책들 / 726쪽 / 2007 (2002)

ps. 책을 읽는 동안 토마스 하디의 『테스』가 간간히 떠올랐다. 질풍노도의 시기였던가, 이상스레 나른한 기분으로 읽어내려갔던 『테스』가 풍광을 드러내던 방식을 많이 닮아 있다. 은근하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람의 애간장을 끓게 만드는 성의 묘사 방식 또한 닮았다. 물론 20세기의 작가 세라 워터스가 보여주는 것은 레즈비언들을 통한 동성애의 묘사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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