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중산층이 자신의 삶을 독려하는 방식 속의 독소...
작가의 두 번째 작품집이다. 주로 젊은 여성을 화자로 삼거나 그 여성의 속내를 화두로 삼아, 일상 생활 속의 물건이나 상황들 속에 적절히 안착시킴으로써 성공적인 글쓰기를 해내는 작가이다.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스토리의 전개가 나름 경쾌하고 기승전결이 심플하여 부담이 없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영상 매체로부터의 러브 콜을 받는 소설이 된 것이 아닐까...) 여기에 쉽게 읽히면서도 간간히 말 속에 뼈가 있으니 지적인(?) 충족감도 없지 않다.
「타인의 고독」.
이혼한 남자 그리고 전처...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는 사람들도 문득문득 솟구치는 고독감에 몸부림을 치는 것이 일상다반사이니 이들의 고독이야 어련하겠는가... 그렇게 내가 고독하면 당신도 고독할 것이라는 이심전심의 발현이 바로 ‘타인의 고독’이 아닐까... 그러니 자식을 ‘재혼 전문 결혼 정보 회사’에 등록시켜 새장가를 들게 하려는 모정이 있어도, 사랑하는 강아지를 전남편에게 넘기고서라도 따라 가야 하는 외국인 남자 친구가 있어도, 고독하기는 매한가지일터... (라고는 했지만 소설은 꽤 진지하다. 고독이란 원래 진지해야 하는 법, 그걸 넘어서기 위해서는 가끔 스스로를 희화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안 그러면 사고가 난다, 이들이 겪는 한 밤의 교통사고처럼...)
「삼풍백화점」.
남자 고등학교의 동창이라는 것과 여자 고등학교의 동창이라는 것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궁금하곤 했다. 하지만 결론이 나지는 않는다. 남자 고등학생들의 동창 대하는 법, 에도 차이는 존재하는 것이니... 소설은 우연히 만난 여고 동창생과의 짧은 조우와 관련되어 있다. (인터뷰를 보니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작가가 그러한 스스로의 룰을 어기고 쓴 첫 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작가는 삼풍백화점으로 콩나물 심부름을 가기도 했다니까...) 취직을 준비하던 내가 짧게 도왔던 친구가 직원으로 있는 매장, 그리고 다시금 서먹서먹해진 두 사람 사이는 삼풍백화점의 붕괴와 함께 어쩌면 영원히 단절되어버린 것인지도... 사소한 틈은 때때로 영원처럼 벌어지기도 한다...
「어금니」.
작가가 주로 다루는 (주로 중산층 이상의) 여성 주인공의 어쩔 수 없는 허위의식이 이번에는 모성애라는 모양으로 보여지고 있다. 부족할 것 없는 유한 부인으로 보여지는 여인은 치과 치료를 하던 중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아들의 사고를 둘러싼 일련의 비밀들은 발치하지 않고 대충 봉합되는 어금니처럼 그렇게 유야무야 되고 만다. ‘아마도 나는, 나와 영원히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속으로 외치는 그녀이지만, 아들의 보호라는 명목 앞에서는 모든 것이 소용없다.
「오늘의 거짓말」.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양치기 소년의 우화가 정이현식으로 바뀐 것만 같다. 인터넷쇼핑몰에 거짓 사용 후기를 올리는 (그러니까 주로 굉장히 좋은 상품이다라는 글을 올리는 일종의 마켓팅 행위이겠지...) 일을 하고 있는 여자는 어느 날 우연히 윗집에 사는 그 노인을 만나게 된다. 대낮에도 썬글라스를 쓰고 나타난 이 전직 대통령을 빼어닮은 노인의 이야기를 남자에게도 하지만 그것을 믿어줄 리가 없다. 게다가 윗층에서 나는 소음은 어쩌면 자신이 아주 조용하다고 사용후기를 올린 바라고 그 런닝머신이 아닌가... 모든 종류의 거짓말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현대인들을 위한 비가...
「그 남자의 리허설」.
이번 소설집의 특징 중 하나는 남자 주인공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는 것... 도시 중산층 여성들을 향하던 작가의 시선의 외연이 조금 넓어진 것 아닌가 싶다. 소설의 주인공인 어린 시절 촉망받는 보이 소프라노였으나 이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된 남자가 (자신의 부인 덕분에 살고 있는) 최첨단 초고층 아파트를 나섰다가 맞닥뜨리는 난처함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게다가 이러한 남자를 따라다니는 악취는 도대체 무엇일까... 꿈을 잃어버린 자의 난감한 하루는 그렇게 어린 시절의 꿈과 맞닥뜨리는 순간으로 마무리되지만, 그의 악취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비밀과외」.
과외가 나라의 정책으로 금지되던 시절... 믿기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쉬하며 과외를 받던 시절... 바로 그 시절의 이야기이다. 불법으로 미제 물건을 팔아 불법 과외의 자금을 마련하는 엄마, 과외를 통해 학비를 벌면서 나라를 향한 항변에 여념이 없는 과외 선생... 어딘지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듯한 두 사람은 묘하게 닮아 있는 듯도 한데...
「빛의 제국」.
근미래 자살문화연구센터 연구원이 밝히고자 하는 2004년 한 소녀의 자살에 대하여 쓰고 있다. 청소년 범죄자의 보호를 위하여 설립된 ‘비원여자고등학교’라는 이름의 청소년 범죄자 수감소에서 벌어진 다양한 일들이, 십수년이 지나 당시 관련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밝혀지는데... 하지만 설정 자체가 조금은 무리이다 싶고, 다른 작품들이 현실적인 데 비하여 작품은 좀 어거지가 아닐까... 조금은 정치적인 소재도 작가에게는 무리인 듯...
「위험한 독신녀」.
어린시절부터 타고난 미모로 고초를 겪은 고교동창 양채린... 남아메리카로 결혼과 함께 떠났던 그녀가 서울에 나타나고, 난 우연히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미심쩍은 옷차림과 태도로 그녀의 정신 상태가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는 어찌해야할 바를 모른다. 오랜 시절 자신이 그녀에게 붙여준 별명, 그리고 그로 인해 더욱 엉망진창의 길을 걷게 되고 만 것만 같은 그녀 양채린... 이제 나는 양채린을 향했던 자신의 잘못을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고백하려 하고 있다.
「어두워지기 전에」.
일곱 번째 맞선 파트너였던 남편과 결혼하였고 섹스리스 부부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나... 하지만 별다른 불만이 없던 나와 남편의 결혼 생활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어린 아이가 독살당하면서 새로운 의심의 보금자리가 되고 만다. 독극물에 의한 연쇄 살인으로 밝혀지는 다양한 유아 살인과 의심스러운 남편의 행동 반경, 하지만 드러나는 것은 남편의 외도일 뿐, 살인에 대해서가 아니다...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고사하고, 서로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조차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한 우리들 현대적 부부들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부분이 조금은 적나라하게 밝혀진다.
「익명의 당신에게」.
병원을 무대로 하는 다양한 글들이 있고 티비 드라마가 있다. 그곳에는 삶과 죽음이 있고, 다양한 질병으로 인하여 위무받아야 할 환자들이 있으며, 사회의 상류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의사들이 있고,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일을 하지만 의사와는 그 급을 달리하는 간호사를 비롯한 많은 노동자들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으니 무엇의 소재인들 되지 못할까... 소설 속의 주인공은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젊은 안과 의사와 교제중이다. 하지만 한번도 자신의 몸을 탐하지 않는 그 의사에게 안달을 하고 있는 와중에 병원에서 사고가 터진다. 항문외과에서 치료를 받던 여자가 담당 의사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항문 사진을 찍히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 그리고 그 용의자로 주인공의 연애 상대이기도 한 의사 상현이 지목된다. 게다가 나는 그의 컴퓨터에서 여자들의 엉덩이 사진을 발견하게 되는데...
정이현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선택은 굉장히 현실적이다. 그들은 자신의 안위 혹은 자기 가족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한다. 사실 정이현의 소설에는 도덕도 사회적 책임감도 없다. 그건 우리 사회 중산층이 가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언제든 자신의 삶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우려하고,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좀더 높은 그레이드에 소속되기 위하여 끊임없이 추동당하고, 자신의 삶이 흔들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언제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무엇과도 야합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소설 속에 있다. 하지만 정이현의 소설은 딱 거기까지이다. 어쩌면 작가는 자기 자신이 속한 계층 혹은 계급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고 파악하고 있어 소설을 잘 쓸 수 있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좀더 앞으로 밀고가지는 못한다. 좀더 앞으로 나아가길 원하게 되지만, 아마도 작가에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럴 것이다...
오늘의 거짓말 / 정이현 / 문학과지성사 / 328쪽 /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