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定住)하지 못한 자들의, 여기 있어도 여전한 불안의 정체...
「완벽한 스테이크와 적양배추 요리」
여자가 준비한 ‘완벽한 스테이크와 적양배추 요리’를 남자는 먹을 수 없다. 식탁에 놓여진 ‘완벽한 스테이크와 적양배추 요리’가 여자를 기다린다. 여자는 스테이크를 가위로 잘라 입에 넣고 천천히 씹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여자와 남자, 애초에 남자의 의지는 결여되어 있었고, 어느 순간 여자의 의지가 사라졌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지만 거기서부터 무언가가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어머니들」
“바다에서 잡은 잡고기의 비늘을 벗기고 회를 떴던 남자의 얼굴은 까맣게 잊었어도 서툴렀던 칼질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커다랗고 억세 보였던 손을 가진 남자는 날렵하고 섬세하게 움직였던 손의 주인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삼 형제에게 공평하게 보여주었던 사진 속 남자 어른은 삼 형제 모두의 아버지이고 누구의 아버지도 아니었다...” (p.59) 아버지가 ‘모두의 아버지이고 누구의 아버지’도 아니었던 그 세월 동안 어머니는 세 형제에게 모두 나름대로 ‘좋은 어머니들’로 존재하였다.
「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
혜순의 딸 연희는 희곡을 쓴다. 아버지 재섭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고 딸의 작업과도 연이 닿아 있지만 딸의 작품을 읽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까지 연희의 작품을 가장 먼저 읽고 감상을 말하는 것은 혜순의 몫이었다. 하지만 지금 연희가 쓰고 있는 작품인 ‘돌아오는 아이들’의 이야기만은 혜순이 읽을 수가 없다. 한국으로부터 외국으로 입양을 갔던 아이들이 그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으로 돌아오는, 그러나 이곳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이야기이다. 어째서 혜순은 그 이야기를 앞에 두고 난망의 마음이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희곡 속의 이야기가 혜순의 이야기로 습자하듯 이어지는 것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존, 로베르트, 은희」
“은희 혼자 좁은 방에 남아 있었다. 영정과 유골함이 없는 탁자 위에 흰 꽃이 수북했다. 향불이 꺼지기 전에 존이 잠시 머물렀던 자리를 사진으로 남겨놓으려고 휴대전화를 꺼내다가 은희는 멈칫했다. 향냄새가 꽉 찬 텅 빈 방에서 누군가 울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인지 어른의 울음인지 알 수 없었다. 울고 있는 사람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다가 흰 꽃과 향로가 놓인 탁자 앞으로 걸어가서 은희가 무릎을 굽히고 손을 내밀었다. 은희는 우는 아이를 달래본 기억이 있었다. 불명에서 비롯된 아홉 살 아이는 추도식 내내 탁자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듯했다.” (p.115) 위의 문장 속 ‘우는 아이’는 어쩌면 존과 로베르트와 은희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경험일 수 있다. 존의 추도식에서 은희는 그렇게 과거의 그들을 끄집어내 위로하고 싶은 것이리라.
「이규호 노먼 테리어」
〈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 〈존, 로베르트, 은희〉 그리고 〈이규호 노먼 테리어〉는 어려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성인이 되어 한국으로 추방당하였고 결국 한국 도착 6년 만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김상필 필립 클레이 씨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오래전 관련 다큐멘터리를 본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인이라고 할 수 없고 미국에서 자랐지만 미국인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던 한 사내의 이야기가 애달프다.
「피아라 식당의 손님」
제목에 나오는 피아라는 아내가 밥을 내어주는 외국인 청년 버랄이 고국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하고 싶다는 식당의 이름이다. 바다에 나가 평생을 일하였지만 바다를 무서워 하였던 아버지, 자신의 일터인 지하철 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기관사와 같이 일과 자신을 행복하게 연결시키지 못하였던 이들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O리의 목사」
“... 한입 크게 베어 문 고구마가 유의 목구멍에 걸려 넘어가지 않았다. 크고 선량해 보이는 유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박의 아내가 컵에 물을 따라 유의 손에 건네 주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자 유의 목구멍을 막았던 고구마 덩어리가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유가 눈가를 훔치고 목울대를 더듬어 만졌다. 박이 허락해준다면 외딴 집에서 감자를 캐고 나물을 뜯고, 메주를 띄워 된장과 간장을 담그면서 살고 싶었다...” (p.186) 선량함은 종교로부터 비롯되지 않는다. 사람으로부터 비롯된다.
「봉희」
“이제 곧 쓰게 될 자서전 첫 문장을 떠올리면서 봉희는 한 사람의 생을 얼마만큼 정직하게 기록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거짓 없이 살아온 사람만이 진실하게 글을 쓸 수 있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웠다...” (p.207) 봉희는 자서전을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순간 봉희가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문장은 다음과 같다 ‘결혼 29주년 기념일 저녁에 성중과 함께 파스타를 먹고 미완의 소설은 반납하려고 혼자 시립도서관으로 갔다.’ (p.214) 아마 로베르트 무질의 미완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의 어느 구절을 닮아 있는 문장일 것이다.
「회촌의 달」
“포대 안에는 깨보다 이파리와 꽃부리가 더 많이 담겨 있는 듯싶었다. 양손으로 허리를 짚고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노인의 곁으로 다가가서 왜 잡물까지 포대에 쓸어 담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들고 있어도 허리가 전부 펴지지 않는 노인은 키로 까불러 쓸모없는 것들은 전부 날려 보낼 거라고 대답했다.” (p.229) 소설 속의 나는 글을 쓰는 자이고, 위의 문장 그러니까 깨를 터는 노인의 포대에 담겨진 잡물들은 키로 까불러 날려 보내면 된다는 말은 글쓰기를 똑바로 가리키는 것만 같다.
「유채」
읽다가 어느 순간 눈치를 채게 되는 순간부터 가슴이 아프다. 유채꽃 피는 섬으로 여행길에 나섰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이 그리고 아이의 친구들을 위한 엄마의 상차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이후부터 겨우겨우 소설을 읽게 되고 만다.
서성란 / 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 / 강 / 284쪽 /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