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2시간전

더글러스 스튜어트 《셔기 베인》

사회경제적 상실의 여파가 밀려든 가장 밑바닥에서는...

  “셕은 엑셀을 세게 밟았다. 도시가 변하고 있었다. 변화가 사람들의 얼굴에서 보였다. 글래스고는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고, 방황하는 도시를 셕은 택시의 창문을 통해 전부 보고 있었다. 변화는 셕의 벌이에서도 느껴졌다. 대처가 정직한 노동자들을 버렸으며 테크놀로지와 원자력과 사보험에 미래를 걸었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공업의 시대는 끝났다. 클라이드강의 조선소와 스프링번 철도건설의 형해가 부패한 공룡의 뼈대처럼 도시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아버지의 직업을 약속받았던 공영주택 출신 젊은이들의 미래가 깡그리 사라졌다...” (p.66)


  《셔기 베인》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를 배경으로 한다. 신자유주의의 팽배와 함께 허물어져가는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자들, 그 노동자들의 삶이 머무는 도시가 바로 소설 속의 글래스고이다. 그렇지만 소설이 정치경제적인 메시지에 주목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 계급에서 헛된 꿈을 꾸었던 애그니스가 바로 그 노동자 계급의 남자들과 함께 하면서 잃어버린 것을 메시지로 삼는다.


  “애그니스가 달려들어 셕의 목을 움켜쥐었다. 셕은 허리 지갑을 식탁에서 들고 애그니스의 입에 혀를 강제로 밀어 넣었다. 작은 손뼈를 모조리 으스러뜨릴 것처럼 쥐고 나서야 애그니스의 손을 떼어낼 수 있었다. 애그니스는 셕을 사랑했고, 셕은 그녀를 영영 떠나기 전에 완전히 망가뜨려야 했다. 훗날에 다른 사람이 와서 사랑할 수 있게 고이 두고 가기에는 애그니스 베인이 너무 특별한 여자였다. 그 누구도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부숴버려야 했다.” (p.154)


  애그니스가 첫 번째 결혼을 그만둘 때 두 자녀 캐서린과 릭이 있었다. 이후 택시 기사인 셕 베인과 결혼했고, 셔기 베인이 태어났다. 소설은 셔기 베인의 성장담이기도 하다. 하지만 셔기 베인이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익히기도 전에 애그니스와 셕은 파탄에 이른다. 애그니스는 버림받았고, 셔기 베인 또한 마찬가지이다. 셔기 베인은 너무 어렸고 배다른 누이와 집을 떠난 다음까지도 애그니스의 곁에 남아야 했다.


  “가끔, 자주는 아니고, 애그니스는 콜린과 사이좋게 지낼 수 없다는 것이 아타까웠다. 애그니스는 인정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겠지만, 사실 두 여자는 공통점이 많았다. 한 번은 빅 제임시가 마지막 실업수당을 중고차와 아이들 비비총에 탕진했다고 진티가 말했다. 그 덕분에 콜린은 파인페어 슈퍼마켓에서 음식을 훔쳐서 크리스마스 저녁을 차려야 했다. 애그니스와 콜린 두 여자 모두 가난의 모서리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알았다...” (p.225)


  셔기 베인이 눈으로 보고 미루어 짐작하는 애그니스의 파탄지경은 읽어내기 힘들 정도이다. 알콜에 완전히 의존하게 된 애그니스는 정부에서 제공되는 쿠폰으로 술을 산다. 술만 마실 수 있다면 도시의 허름한 노동자들을 집으로 불러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거기에 셔기 베인이 함께 있다는 사실도 아무 소용이 없다. 나중에는 거기에 셔기 베인이 있다는 사실조차 그녀는 잊은 것 같다. 


  『“다 합쳐서 얼마예요?” 돌런 씨가 염장햄을 장바구니에 넣으려는데 애그니스가 물었다.

“5파운드 2펜스요.” 돌런 씨가 대답했다.

애그니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오, 오늘 신문도 주실 수 있을까요?”

“5파운드 27펜스요.”

“우리 셔기 줄 캐드버리 초콜릿도 하나 주세요.”

“5파운드 50펜스요.”

“또 뭐가 필요하더라.” 애그니스는 기억을 더듬는 척했다. “아, 맞다. 잊어버릴 뻔했네.” 셔기는 창피해서 신발만 내려다봤다. “스페셜 브루 열두 캔 주실 수 있을까요?”』 (p.454)


  그 사이 유진이라는 또 다른 택시 기사가 애그니스의 앞에 등장한다. 애그니스는 알콜중독자 모임에 나가는 중이었고 금주 성공의 기한을 점차 늘려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결국 애그니스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술 한 잔 가볍게 하는 것으로 정상인임을 입증하라는 유진의 요구를 애그니스가 받아들이는 순간은, 소설의 많은 선택의 순간들을 모두 합친 것만큼 가슴이 아프게 다가왔다.


  “장애판정서비스국은 애그니스의 화장 비용은 부담하겠지만, 월리와 리지가 묻혀 있는 가족묘에 공간이 없으므로 새로 터를 잡아 매장할 비용까지는 대줄 수 없다고 통보했다. 릭은 애그니스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게 막았다... 그러나 애그니스와 같은 AA 모임에 종종 나가던 옆 단지 여자를 통해 소식이 단체에 알려졌고, 곧 낯선 얼굴들이 집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소식이 흘러 흘러 핏헤드에까지 닿아서, 그 옛날의 악귀들이 전부 댈더위 화장장에 나타났다.” (p.572)


  결국 허구이지만 소설의 많은 부분은 자전적이라고 작가 더글러스 스튜어트는 밝히고 있다. 때문에 작가가 원했건 그러지 않았건 바로 그 시대, 1980년대의 노동자 계급을 둘러싼 디테일들이 꿈틀댄다.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경제적 상실이 발생할 때 그 여파가 밀려드는 가장 밑바닥, 작가의 글이 결국 가라앉게 되는 것은 바로 그곳인 셈이다. 그리고 셔기 베인, 작가 더글러스 스튜어트는 그곳으로부터의 생존자이다.



더글러스 스튜어트 Douglas Stuart / 구원 역 / 셔기 베인 (Shuggie Bain) / 코호북스 / 593쪽 / 2021 (2020)

매거진의 이전글 아니 에르노 《그들의 말 혹은 침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