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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3시간전

델핀 드 비강 《길 위의 소녀》

성장은 조각보 같은 감정의 편린들로 채워지는 시간의 길...

  루 베리니탸크는 열세 살의 소녀이다. 두 번 월반을 하여 현재 루의 동급생들은 대부분 열다섯 살이다. 동급생들로부터 질시를 받는 천지 소녀 루는 어느 날 발표 주제에 대한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고 불쑥 ‘노숙자’라고 대답한다. 그제야 루는 대답의 무게를 인지하게 되는데, 그순간 뤼카의 미소를 확인하고 만다. 뤼카는 루가 자주 바라보는 열일곱 살의 같은 반 소년이고, 루는 이제 많은 것을 되돌릴 수 없다.


  “살아오는 내내, 나는 어디에 있든지 언제나 바깥에 있었다. 난 항상 이미지나 대화의 바깥으로 동떨어지고 어긋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말이나 소리를 나 혼자만 듣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잘만 듣는 말을 나만 액자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유리창 저편에서 못 듣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어제 나는 그곳에 그 애와 함께 있었다. 확신하건대, 하나의 원이 우리 둘을 한데 둘러쌌다. 나를 바깥으로 내치지 않는 원, 그 애와 나를 하나로 감싸는 원, 고작 몇 분에 지나지 않았을지라도 세상에서 우리를 보호해주는 원.” (p.17)


  길에서 생활하는 소녀 노에게 접근한 것은 루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루는 한눈에 노와 자신이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노와 루는 (이 소설의 원제는 ‘노와 나’ 이다) 이제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루는 묻고 노는 대답한다. 루는 노에게 음료를 사고 카페에 머물 수 있도록 돕는다. 루는 노와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발표를 하고 동급생들로부터 박수를 받는다. 발표는 끝났다.


  “키스를 할 때는 혀를 어느 방향으로 돌려야 하나? (논리적으로는 시계 방향이 맞을 것 같지만 키스라는 것 자체가 이성에서 벗어나는 거니까, 다시 말해 사물의 질서에 위배되는 것이니까 시계 반대 방향이 맞을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되겠다.)” (p.90)


  하지만 노를 향한 루의 관심은 끝나지 않았다. 루에게는 우울증으로 집에만 있고 허깨비로 남은 엄마가 있다. 루의 엄마는 루의 동생 타이스를 돌연사로 잃고 난 이후 그 상태에 머물러 있다. 루는 엄마의 사랑을 잃었고, 루의 가족은 아슬아슬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 루의 엄마가 노의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갖는다. 이제 노는 루의 집으로 들어온다. 타이스의 방이었다가 아버지의 작업실이었던 공간에 노가 산다.


  “노는 우리 집에 있다. 밖은 겨울이다... 길에서 사람들은 침낭에 들어가거나 빈 종이상자를 덮고 잔다. 지하철역 입구 안쪽에서, 다리 밑에서, 혹은 그냥 땅바닥에서 그렇게 잔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방당한 도시의 후미진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잠을 청한다. 노가 가끔 그 생각을 한다는 건 나도 알지만 우리는 그런 얘기는 안 한다. 난 밤에 불쑥 거실에 너가서, 유리에 바짝 붙어 야경을 바라보는 그 애를 본다. 하지만 그 애 머릿속을 지나가는 생각들은 모른다. 하나도 모른다.” (p.148)


  이제 루는 노와 함께 뤼카의 집을 자주 찾는다. 이혼하여 집을 떠난 아빠, 재혼하여 집을 떠난 엄마를 둔 뤼카의 집에는 주로 뤼카 혼자 있다. 세 사람은 그곳에서 우정을 나눈다. 함께 음식을 먹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다. 하지만 이러한 완벽한 상황이 계속 유지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함께인 거지, 루? 우리는 함께야?’ 노는 내게 묻고 어느 순간 루도 노에게 같은 물음을 던지게 된다.


  “전에는 ‘사정’에 존재 이유, 숨겨진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에는 그런 의미가 세상의 구조를 관장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은 이유, 나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망상이다. 그런 면에서 문법은 명제들이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공부를 하면 그 논리를 파헤칠 수 있다고 믿게끔 만드는 일종의 기만이다. 숱한 세월을 거쳐 이어온 기만. 이제는 나도 인생이 휴지休止와 불균형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한 연속에서, 질서는 그 어떤 절박한 필요에도 결코 부응해주지 않는다.” (p.249)


  《길 위의 소녀》는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지적으로 조숙한 소녀 루는 동급생인 뤼카를 통해, 길 위의 소녀인 노와 함께 하며 사랑과 연민을 비롯한 삶의 조각보 같은 감정들을 획득해나간다. 집 안의 엄마로 인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난의 감정들은 바로 이 과정들과 오버랩되면서 또다른 차원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가벼운 문체와 스토리 전개 속에 다뤄지지만 그 주제가 무겁다.



델핀 드 비강 Delphine de Vigan / 이세진 역 / 길 위의 소녀 (No Et Moi) / 비채 / 303쪽 / 201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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