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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갈팡질팡 소설가의 소설가 된 우여곡절 모음집 같은...

by 우주에부는바람

1999년도 월간 《현대문학》의 추천공모에 「버니」라는 소설을 작가가 발표했을 때 눈여겨 읽은 적이 있다. 랩의 형식을 띠고 있던 소설은 경쾌한 음율에 한 창녀의 이야기를 얹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 참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형식이었음에도 그게 입에 착착 감겨드니 이 작가 재주도 좋다, 고 속으로 칭찬했던 것도 같다. 그런 그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그리고 이번 소설집에서도 그의 발군의 실력, 그러니까 소설마다 나름의 독특한 형식을 견지하면서도 자신의 메시지 전달 또한 소홀히 하지 않는 실력은 여전해 보인다.


「나쁜 소설 - 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내어 읽어주는 이야기」.

‘부제처럼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직접 소리내어 읽어주도록 씌어진 소설’이 여기에 있다. 이름하여 나쁜 소설... 누군가에게 읽어주어야만 하는 소설이고, 그러니 반대로 누군가가 읽어주는 것을 듣는 것으로만 존재하는 이 소설이 왜 나쁜지는 소설의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다. “... 이 세상 어디를 가봐도, 마음 놓고 소설 한 편 읽어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 당신 곁에, 당신이 읽어주는 소설 한 편 끝까지 들어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인식... 따지고 보면 당신이 ‘윤대녕’ 소설에서 멀어지게 된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현실세계의 벽 때문이었죠. 시간이 흐르고 흐르다보니,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이, ‘윤대녕’ 소설에서 그려지는 세계보다 더 소설 같고, 더 사막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소설 한 편 편히 누군가에게 읽어 줄 수 없는 형편이 나쁠 수도 있고, 현실이 소설을 능가하니 이를 배제한 소설은 나쁜 소설이야, 라는 외침으로 들릴 수도 있다. 여하튼 이 작가 자신의 선배 작가 이름을 들먹이는 과감함을 보이면서 우리들 현실의 허름함(소설에 비하여)과 우리들 소설의 나쁨(현실을 쌈 싸먹으려 하니)을 엿먹이려 하고 있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가정식 야채볶음흙」.

곧 돌아온다는 아비의 말만 믿고 있다가 우연히 흙에 맛을 들인 주인공... 그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널린 게 흙이니) 먹고 살 수 있게 된 주인공은 학업도 그만두고 (먹고 살기 위한 학업이 흙을 먹고도 살 수 있는 주인공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그렇게 살아간다. “... 지상에 올라와 흙을 먹다보니, 세상살이라는 것이, 그게 참 우습게만 느껴졌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불철주야 직장생활을 하는 세상 모든 아버지들과, 한푼이라도 아껴가며 저녁 반찬을 준비하는 세상 모든 어머니들,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기 위해 코피 쏟으며 공부하는 세상 모든 자식들, 그들이 안간힘을 다해 열중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그저 덧없고 허망하게만 여겨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살던 집 아래에 위치한 흙을 몽땅 파먹는 바람에 이사를 하게 된 곳에서 그는 명희라는 눈먼 소녀를 만나게 되고, 그 소녀를 흙을 먹는 유일한 자신의 후계자를 삼는다. 하지만 그렇게 천국같은 두 사람의 땅 속 유랑은 끝이 나고... 전체적으로 흙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요리법 강좌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소설...


「원주통신」.

무엇이든 소설의 재료로 삼을 수 있는 작가의 독특한 능력... 작가 박경리가 살던 근처에 살았다는 설정 하나로도 이렇게 근사한 소설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집 근처에 살던 박경리 선생을 맘대로 자신의 혈족으로 부풀렸던 나는 아직 부모집에서 무위도식하는 신세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오래전 친구의 부름을 받고 사건에 휩싸이게 되는데... 그것은 박경리의 소설 제목인 ‘토지’를 룸쌀롱의 상호로 사용하려는 친구에게 울며겨자먹기로 ‘토지’라는 이름의 사용 승인을 받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하지만 박경리 선생에게서 그런 승인을 받아 올 수 있을 리가 없는 나는 고생만 죽어라고 하고 결국 부모님의 힘을 빌려야 했다. 『시간이 좀 흐른 뒤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박경리 선생과 어느 대학교수와의 대담 내용을 실은 잡지를 읽게 되었다. 그때, 대학 교수는 박경리 선생에게 어떻게 그리 오랜 시간, 한 소설만 쓸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생이 대답했다. “그냥 계속 뭘 물어본 거지, 뭐.” 그래서 나는 잡지를 읽다 말고,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그럼요. 그럼 됐죠, 뭘.”』박경리 선생의 절묘한 대답 속에는 소설 쓰는 이의 깊은 지혜가 보인다. 작가는 아마도 그런 지혜를 흠모하는 듯...


「당신이 잠든 밤에」.

두 명의 친구가 있다. 지지리궁상으로 살아가던 두 친구는 어느 날 결심을 한다. 일하고 있던 편의점에 들어왔던 재수없어 보이던 처자의 차에 들이받혀 자해공갈단 노릇을 하기로... 하지만 지지리궁상인 이들에게 자해공갈단 노릇도 쉽지는 않다.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는 저녁으로부터 아침에 이르기까지 처연하기 그지없는 이들의 자해공갈단 미수기를 읽고 있자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국기게양대 로망스 - 당신이 잠든 밤에 2」.

자 여기에 세 명의 남정네가 있다. 첫 번째 남자가 깃대에 오른다. 그는 남몰래 깃대에 올라가 깃발을 잘라낸 다음 이 깃발을 되파는 작은 절도를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가 깃대에 올라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남자가 깃대에 오른다. 그는 깃대와 사랑에 빠진 사이이다. 세 개의 깃대가 나란히 있는 게양대의 가장자리쪽 깃대와 사랑에 빠진 그는 누군가에게 업힌 듯 편안한 자세로 깃대에 달라붙어 깃대와 마음껏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잠시 후 세 번째 남자가 깃대에 오른다. 그는 사라진 아내를 찾아나선 길이다. 그리고 아내와 인연이 있는 이 게양대에 왔다가 깃대에 오른 두 사람을 보고 이들과 이야기를 하러 깃대에 오른다. 국기게양대에서의 세 남자의 조우라고 명명해도 좋을 소설은 기발한 아이디어 속에서도 예의 그 지지리궁상의 백미를 놓치지 않고 있다. 깃대에 매달리는 일은 도대체 어떤 느낌을 줄까, 한번 시도해보고 싶을 정도...


「수인(囚人)」.

이 작품 또한 독특한 설정이다. 첫 번째 소설을 낸 이후 절치부심하다가 큰 맘먹고 산 속에 들어가 차기작을 준비했던 주인공은 그러나 세상에 나오자마자 커다란 혼란에 빠져버린다. 핵폭발 사고가 일어나 대한민국은 풍비박산이 난지 오래고, 이제 남은 사람들은 살 길을 찾아 외국에 망명할 수 있도록 심사를 받아야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일과 연을 끊고 있던 이 소설가도 이제 살 길을 찾기 위해, 이제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던 책을 찾아 시멘트로 막혀버린 교보문고 입구를 곡괭이로 뚫어야 하는 처지이다. 소설을 써야 소설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로부터도 외면을 받았던) 자신의 소설을 찾아내야 소설가가 될 수 있다는 설정, 하지만 해외로의 망명이라는 소설가의 소망을 실현시키는 것은 소설이 아니었다는 반전으로 이어지는 단편이다.


「할머니, 이젠 걱정 마세요」.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야기들을 책이 아닌, 할머니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할머니를 통해서 뱀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죽은 사람들이 때론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글을 몰랐던 나는, 할머니를 통해서만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할머니는 평생 글을 모르고 살아왔다.” 이야기의 근원은 누가 뭐라 해도 글이 아니라 말이다. 말로부터 비롯되지 않은 글이 존재할 수 없다면 말은 글의 근원이 될 터, 바로 나의 근원이 할머니인 것과 같은 맥락일 터이다. 이야기의 뿌리에 대한 탐구와 한국 근대사의 한 켠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적절히 조화시키고 있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소설 쓰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된 자신의 성장 히스토리를 밝히고 있는 소설이랄까... “... 누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소설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만큼 나온다고. 나는 에라이, 뿅! 만큼 살았으니, 에라이, 뿅 같은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겐 리얼리즘이었으니까. 그것이 내 태생이었으니까.” 그리하여 어린 시절부터 집단 린치의 대상이기를 밥 먹듯이 했고, 경찰서 피의자 조서를 꾸미면서 경찰에게서 육하원칙에 맞는 문장 지도를 받고, 그렇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불운한 사건들 앞에서 ‘갈팡질팡하며’ 어찌할 줄 몰라 하다 ‘간신히 그 우연들에서’ 벗어난 나, 그러니까 작가는 그 ‘갈팡질팡들을’ 결국 글로 옮기고 이제 어엿한 소설가가 되었다는 말씀이렸다...


책 뒤에 실려 있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문장이 참으로 절묘하여, 그것만큼 이기호의 소설을 줄여 설명하기 어려울 듯하여, 옮겨보자면 이렇다. “그가 보여주고 있는 이 아이러니의 소설공학은 2000년대 문학이 선사하는 여러 유쾌함들 중에서도 가장 ‘개념 있는’ 유쾌함 중의 하나다. 그 아이러니의 저의(底意)가 대부분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기 때문이다... 조롱과 연민 혹은 웃음과 눈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우리 이럴 줄 알았다...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이기호가 그들을 다루는 방식이 얄궂기 때문이다...”


이기호 /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 문학동네 / 325쪽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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