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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수 《캐비닛》

한 말씀 웃기게 전달하는 기상천외한 스토머들의 이야기...

by 우주에부는바람

김언수는 박민규 이후 등장한 가장 탐탁한 작가 중의 하나, 아니 박민규의 계보를 잇고도 남음이 있는 하나의 작가라고 보여진다. 독특하기 그지없는 그의 상상력은 박민규의 그것처럼, 우리의 척박한 문학판 안에서는 비슷한 류를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등장은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트리즐리 구한경을 만났을 때 만큼이나 충격적이지만 또한 그만큼 기쁜 일이기도 하다.


사실 내가 처음 구한경씨를 만났을 때 그는 국내 최초이자 유일의 트리즐리였다. 1968년생인 구한경씨는 강원도 원주의 치악산 아래의 한 산촌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다른 또래의 아이들이 이제 막 걸음마를 하고 옹알이를 하기 시작할 때 그는 집 앞에 있는 상수리 나무에 오르기 시작한다.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어린 한경이 사라져 온 동네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다. 마을 앞 저수지을 비롯해 한경의 집에서 일 킬로미터 떨어진 동해선 열차 선로까지를 샅샅히 뒤졌지만 발견되지 않았던 한경은 하루 반 나절이 지난 다음날 점심무렵이 되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당에 나타나 그때까지 하염없이 울고 있는 제 어미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는 이야기는 한경의 마을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그후로도 어린 아들이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 동안 사라졌다 나타나는 사건을 몇 차례 더 겪고 나서야 한경의 부모는 그가 그 시간동안 집 앞의 상수리 나무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러한 구한경씨가 본격적인 트리즐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88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부터다. 북유럽을 중심으로 몇 명만이 보고되던 트리즐리의 존재를 한경은 대학 도서관의 오래된 잡지철을 뒤적이다가 발견한다. 도무지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순간에는 안정을 찾지 못하여 식은 땀을 삘삘 흘려여 하고, 나무 위에 올라 가지에 몸을 척 걸치고 나서야 편안해지는 한경은 그때까지 자신이 왜 그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 옛날 켈트족의 마법사 피를 이어받은 이들 중 일부 최상위급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트리즐리라는 이름으로 나무 위에서만 생활했다는 기사를 읽은 이후 한경은 그제서야 자신의 증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1988년 여름 모든 사람들이 올림픽의 열기로 한껏 달아오르고 이용이 자신의 노래 ‘서울’에서 종로의 사과나무와 을지로의 감나무를 부르짖을 때 한경은 드디어 자신이 바래마지 않던 나무 위에서의 삶에 돌입한다. 이미 70년대에 시골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에 자리를 잡은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잠실 주공 아파트 단지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아파트 5층 높이와 맞먹는 상수리 나무들이 있었다. 어느날 그는 몇 권의 책과 몇 개의 옷가지 등 최소한의 생필품을 챙긴 후 발코니를 통하여 나무로 자신의 거처를 옮긴다. 하필이면 올림픽이 열리던 종합 운동장과 근처에서 벌어진 그 일은 몇몇 해외 매스컴에까지 소개되기도 했지만, 국내의 매스컴들은 한경을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에서 해프팅을 벌여 한 건 올려보려는 젊은이 정도로 치부해버린다. 그리고 덕분에 한경은 좀더 조용하게 자신의 트리즐리로서의 삶에 돌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당시 한경과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던 나는 한경이라는 트리즐리를 돕는 국내 최초의 트리즐러가 되었다. 나무 위에서만 사는 한경을 위해 발코니를 통해 생필품을 전달하던 한경의 부모가 다시 시골로 내려가면서 위기에 처한 그를 살린 것이 나였다. 그렇게 나무 위에서의 삶을 거부할 수 없는 트리즐리와 그러한 트리즐리를 돕는 지상의 지원자인 트리즐러로서 관계를 맺기 시작한 우리들은 이후 이십여년동안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런, 쓰다보니 길어졌다. 당연히 위의 이야기는 구라다. 물론 그것이 구라임을 눈치채지 못할 이가 없다. 그런데 김언수의 『캐비닛』은 이런 허황된 이야기로 가득한 데도 그것이 구라임을 쉽게 눈치 챌 수 없다. 아니 사실 그것이 구라임이 뻔한데도 자꾸 혹시, 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혹시 하면서 네이버의 지식인에 이것저것 묻고, 책 속의 내용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에 허탈해 하고, 괜스레 작가의 능스능란한 구라의 능력에 질투를 느끼게 되기도 한다.


“변화된 종의 징후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마땅한 정의가 학계에 나와 있지 않아 우리는 그들을 ‘징후를 가진사람들’ 혹은 ‘심토머(symptomer)’ 라고 부른다... 그들은 현재의 인간과 새로 태어날 미래의 인간 사이, 즉 종의 중간지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쩌면 최후의 인간일 수도 있고 어쩌면 최초의 인간일 수도 있다.”


김언수의 『캐비닛』은 ‘과학의 현미경에서 벗어나면 뭐든지 마법과 이단이 되어버리는’ 과학으로 가득한 현대 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심토머’ 들의 이야기이다. 짧으면 두 달 길면 이 년 동안 깨지도 않은 채 잠을 자는 ‘토포러’, 자신의 일기를 고치고 그렇게 고친 일기 속의 내용으로 새롭게 채색된 기억을 진짜로 믿고 살아가는 ‘메모리모자이커’, 완벽한 남자의 성기와 완벽한 여자의 성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 영혼과 몸을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다중소속자’, 상상 속의 존재를 실재하는 것으로 믿고 실제로 위해를 당할 수도 있는 ‘블러퍼’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손톱에서 자라난 은행나무에게 아낌없이 제 몸을 내던지고 만 사내, 물건이 인간을 닮아 가거나 모든인간이 물건을 닮아 갈 것이라고 믿는 이쑤시개 사내, 경제학 박사학위를 따자마자 십년 간 프리셀만으로 시간을 보낸 사내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처럼 (작가의 말에 의하면 창작, 변형, 오염된) 이야기들을 읽으며 웃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동안 지극히 정상적인 자기 자신을 향하여, 혹시 나도 무언가 알 수 없는 특이점을 지니고 있는 심토머인지도 모른다는 오해의 마음을 품기도 한다. 그러니 또 무수히 존재하는 다름을 무언가 등급화된 차이로 오해하는 내부의 비뚤어진 심성에 대한 반성의 마음을 품게 되기도 한다. ‘새로운 인간의 탄생’, 그 비화를 들려주는 듯한 김언수의 소설은 결국 지금 우리들 내부의 변형되고 오염된 성향을 향하여 한 말씀 웃기게 전달하는 제대로 된 창작물이다.



김언수 / 캐비닛 / 문학동네 / 391쪽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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