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한 관념과 유려한 문장이 달달 끓는동안...
「가을이 오면」.
“잇몸 같은 어머니는 실은 날간처럼 싱싱하고 붉었고, 미역처럼 미끄럽고 천덩거렸다. 어머니는 집요라는 말보다 더 집요했다. 그녀는 어머니만큼 놀라운 집중력과 인내심을 품은 여자를, 어머니만큼 복수심과 파괴충동이 드높은 여자를 클레오파트라 이전엔 일찍이 안 적이 없었다. 그것도 자신이 낳은 딸에 대해서만...” 소설을 통한 엘렉트라 콤플렉스 임상분석쯤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향한 그녀의 놀랍고 집요한 반감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지원받지 못한 성장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남자 친구를 향해 보이는 위선으로 치장된 무욕 앞에서 그녀는 자지러지고 만다.
「분홍 리본의 시절」.
“... 선배는 내 오피스텔에서, 반나절쯤 수협 공판장에서 어정거리고 반나절쯤 국립도서관의 밀폐된 흡연실에서 줄담배를 피운 다음 밤안개를 잔뜩 맞으며 걸어온 노숙자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인간다운 삶이 아니라 그저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것은 작가의 또다른 특징인 것 같다. 작가는 그저 묘사할 뿐 허투루 계몽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묘사하고 또 묘사한다(오규원 선생의 시작법이 생각나는 대목...). 서울의 위성 도시쯤에서 만난 선배 부부와의 묘한 관계, 그리고 그러한 그러한 긴장감이 사라지면서 등장하는 수림이라는 여자,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하다 나에게 되돌아오는 오류 가득한 화살... 만났다 헤어지고 또 만나고 헤어지며 마지못해 만나고 마지못해 헤어지지 못하는 인간사를 들여다보는 몰카에 가까운 묘사...
「약콩이 끓는 동안」.
“... 세상 모든 인간이며 사물이 제자리에 있지 않다가 어느 순간 천연덕스럽게 다시 그 자리에 출현해 자신의 맹점을 비웃는 통에 그는 종종 억울하고 약이 바짝 올랐다.” 언젠가 계간지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작가의 인물들은 어딘지 나약해 보이면서도 어느 순간 상상 초월의 섬찟한 악마성을 발휘하는데 이 소설에서 그것이 가장 극명하다. 사고로 운신이 힘들어진 교수와 교수를 돕기 위해 파견된 대학원생 여자, 그리고 교수의 두 아들과 교수의 가장부인 아줌마...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이들 사이를 약콩 끓이는 소리와 냄새가 부유하고, 어느 순간 폭발한 이들 사이의 관계는 또 그렇게 폭발할 때만큼이나 빠르게 시들어간다. 그래서 생은 평화로운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솔숲 사이로」.
“... 문을 밀고 대청마루로 나오자 상의 주머니에 꽂아둔 펜꽂이의 루비가 햇살을 받아 반짝 빛났다. 늙은 원장은 왼쪽 유두에 따끔한 불꽃이 튀는 듯한 이 순간을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이렇게 햇볕에 튀는 루비의 불꽃을 느낄 때면 원장은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극지방의 백야가 떠올랐다...” 솔향기라는 이름의 단식원, 그 단식원에 들른 손님과도 같은 청년과 단식원의 식구들인 원장, 영양사, 막내, 기사들의 묘한 관계... 시간은 뒤죽박죽이고 그것이 (영양사가 원장이 되고, 막내가 영양사가 되는) 하나의 사이클을 두고 벌어지기 때문에 자꾸 등장인물들을 놓치게 된다.
「반죽의 형상」.
“휴가의 예감은 결투의 예감처럼 끔찍하고 달콤하다. 모욕에 결투로 응하는 풍습은 사라졌지만 그 깨끗한 변제에 대한 향수는 인류의 정신 속에 면면히 남아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결투는 모욕을 청산하는 가장 명쾌한 방식이다... 나를 모욕한 자를 죽이거나 모욕당한 나 스스로 주는 것만큼 모욕을 완전연소시키는 방식이 또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내 휴가 또한 과거의 모욕에 대한 뒤늦은 결투신청이라고 할 수 있다.” 모욕에 대하여 이렇게 명쾌한 설명은 또 없었으리... 대학 4년, 직장 4년 도합 8년을 거치면서 키워온 친구와의 우정...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모욕으로 점철된 세월이었을 수도 있었으리... 긴 휴가를 통하여 세상과의 단절 혹은 친구와의 단절을 꾀하는 그녀인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혹은 중간에 실패로 끝날지는 알 수 없다.
「문상」.
“... 그중 눈길을 끄는 부위는 단연 입술이었다.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입술은 지나치게 옅은 빛깔이었고 어류의 알집처럼 투명했다. 마치 입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발톱이 덜 여문 갓난아기의 분홍 발가락 두 개가 붙어 있는 형국이었다. 부푼 물집처럼, 터뜨려주고 싶은 몹쓸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씰루엣이었다.” 시인인 그에게서 잠시 비정규적인 학습을 받은 그녀로부터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 한 통... 자신의 큰 아버지 장례식에 참가하라는 연락을 받고, 그는 그녀를 떠올린다. 그리고 어떤 모임에든 한 사람쯤 있을 법한, 무시를 당하고 모욕을 당하면서도 이를 알아채리지 못하거나 이에 눈감아버리는 그녀와 얼떨결에 들어선 여관방의 시간들을 떠올리며 나는 스스로를 향하여 씹어뱉는다. ‘썩을!’
「위험한 산책」.
“... 말만 앞서고 바쁜 척만 했지 우산도 그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그에 비하면 무엇이건 잡은 것을 놓지 않는 남편의 강한 악력이 그녀에게는 더 편안했다.” 대학 시절 운동권이었고 이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남편이 간혹 집에서 보이는 괴이한 행동,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그러한 기벽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그녀, 그러한 그녀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학창시절의 후배인 그... 그리고 그녀의 꿈 속에서 나타나 그녀를 뒤에서 강하게 끌어 안은 정체모를 힘... 애착이 사라진 그녀와 남편, 그리고 욕망만이 떨떠름하게 잔존하는 그녀와 그... 모종의 두 관계에 꼭지점으로 자리잡은 그녀의 삶에는 어떤 위험함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작가를 판단하는 나의 태도가 바뀐 것은 이런 것 아닐까... 그러니까 예전에 작가는 고고한 관념의 틈새를 유려한 문장이 채우면서 전체적인 완성도를 높여갔다. 그런데 지금 작가는 고고한 관념의 벌어진 틈새는 방치한 채 유려한 문장을 향한 열망만을 고스란히 양산해가고 있는 것 아닐까... 고고한 관념과 유려한 문장이 비빔밥과 고추장처럼 잘 어우려져 다시 한번 빨갛고 맛있게 비벼지기를 바래본다.
권여선 / 분홍 리본의 시절 / 창비 / 250쪽 /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