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이처럼 풍부하게 철학적 사고로 연결된다...
최근의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인 일본 소설들과 비교하여 무척 진지하면서 또한 흥미롭다. 가볍게 일상을 훑어나가는 최근의 소설들에 비하여 오쿠이즈미 히카루의 소설은 인간을 인간이 되게끔 만드는 인간의 내력을 말하는 데에 주력한다. 부러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문학은 우리들에게 어떻게 철학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가, 하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돌의 내력」.
인간은 유한하고, 그만큼 허약하다. 생각하고 말하고 기능적인 창조가 가능한 지구 상의 유일한 존재라는 견고한 자만은, 스스로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 속에서 그나마 그 힘을 누그러뜨릴 수 있게 된다. 제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던 인물이더라도 모든 것은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만 유효하다. 나의 전 생애를 제외한 모든 기간 동안 나는 어떤 것의 주인도 되지 못하며, 모든 것의 과정에서 찰나처럼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강가의 돌 하나에도 우주의 전 과정이 새겨져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강가의 돌멩이 하나에도, 발길에 채이는 부스러기 돌 하나에는 우주의 전 과정이 새겨져 있다. 수십억 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면서, 끊임없는 주변의 변화에 순응하면서 돌멩이는 지금 이 순간 우리들 눈앞에서 우리의 발치에서 존재한다.
“... 광물의 모양은 한시도 수지 않고 변해. 소재는 끊임없이 순환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대륙조차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다시 말해, 자네가 산책길에 무심코 주워든 돌멩이 하나는 대략 오십억 년 전, 훗날 태양계라고 불리게 된 곳에서 허공에 떠 있던 가스가 응고해 이 혹성이 생겨날 때부터 시작된 드라마의 한 단면이자, 물질의 운동이 찰나의 형태로 담긴, 이른바 우주 역사의 응축물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그렇다고 소설이 인간의 유한함을 돌멩이의 영원성에 비추어 얕잡아 보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소설은 얼마나 우스워졌겠는가.) 소설은 우리들 찰나의 생을 돌멩이의 부단한 존재와 적절하게 겹쳐놓는다. 전쟁 당시 필리핀의 동굴에서 죽어가는 상등병에게 듣는 돌에 관한 이야기는 고향에 돌아온 마나세로 하여금 돌에 미치도록 만들고, 마치 나비의 효과처럼 마나세의 돌에 대한 사랑은 그의 아들에게로 이어진다. 아니 이어지는 듯하다.
“... 손에 든 돌멩이를 보는 것은 곧 자네를 포함한 이 지구 역사의 총체를 바라보고 있는 것과 다름없어. 말하자면 자네는 거기에서 자네 미래의 모습을 발견하는 거야.”
하지만 현재의 돌의 탄생 과정이 뜨겁고 차갑고 갑작스러운 것처럼 마나세의 이후의 생의 과정 또한 그렇다. 마나세의 가족에게 들이닥친 갑작스러운 사고는 가족 구성원 모두의 모습을 바꾸어 놓고 만다. 이들 가족의 불행은 안타갑찌만 그렇게 비로소 인간은 유한하지만 허약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 인간의 찰나의 생에는 우주의 전 과정이 새겨진 돌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세눈박이 메기」.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인 「돌의 내력」과 함께 실려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꽤나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무척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한다.
“... 물고기가 든 양동이를 들고 사랫길을 걷고 있노라면 불꽃처럼 새빨간 해가 바다 쪽 구릉 너머로 저물어가는 것이 보였다. 둥근 하늘의 동쪽은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 있고 가운데로 갈수록 빛깔이 흐려져 서쪽은 황금빛 노을이 져 있었다. 넘실거리는 벼이삭이 논 가득히 타오를 듯 빛나고, 그 위를 잠자리떼가 이리저리 불규칙한 궤적을 그리며 날고 있었다. 어느덧 해는 저물어 마을에 도착할 무렵에는 주위가 어둑어둑해지고 박쥐의 시커먼 그림자가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커다란 삼나무와 느티나무가 있는 동구 밖 돌계단에는 항상 할머니가 마중 나와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 자신을 화장해달라고 부탁한 아버지의 유언, 집안의 대를 이을 사람으로 지목받았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는 마모루 삼촌, 공대를 다니다가 목사를 하겠다며 방향을 선회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목회 활동을 접고 있는 상황인 와타루 삼촌이 등장하면서 소설은 종교와 전통에 대해 이야기 한다.
“... 만약 삼백 년 정도 전의 조상 중에 누군가가 불쑥 나타난다면, 그는 분명 자기의 자손인 나를 사랑해줄 것이다. 어제 무덤가에서 느꼈던 그 감미로운 기분은 아마도 이러한 연유에서일 것이다. 어떻게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만난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한 일이지만, 결국 여기에는 인류애나 이웃 사랑과는 다른, 그리고 개성과도 전혀 무관한 혈연적인 연쇄가 있는 것이다. 개성을 잃고 그 연쇄에 끼어들어가는 것 자체가 감미로운 일인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종교와 전통을 우격다짐으로 중재하려 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양쪽의 이야기를 적당한 긴장 속에 진행시키며 우리들에게 그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유연한 사고를 보여줄 뿐이다. 살다보면 (종교와 미신을 떠나 무엇이 되었든)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닮은 무언가를 다른 사람에게서도 찾는 많은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철학자를 닮은 듯한 이 작가는 희노애락이 저녁 노을처럼 물들어 있는 시골 마을에서, 감미로운 혈연적인 연쇄 가득한 이 가족을 주인공으로 삼아 우리들의 아집에 가까운 어떤 경향들을 조용히 나무라고 있는 것만 같다.
오쿠이즈미 히카루 / 박태규 역 / 돌의 내력 (石の來歷 ) / 문학동네 / 288쪽 / 2007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