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4시간전

앤절라 네이글 《인싸를 죽여라》

2022 대선, 정말 두려운 것은 온라인 혐오 정치의 주류화...

*2022년 3월 8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대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결과에 대한 공포를 말하는 주변 사람들을 향하여 한껏 대범한 척 굴었지만 나 또한 두렵다. 사실 내가 두려운 것은 무지한 이에게 맡겨진 막중한 권한의 몽매한 사용이 아니다. 나는 그를 선택한 일련의 세력, 아둔해 보이는 그를 그 자리에까지 끌어올린, 뻔뻔하고 약삭빠른 이들에게 이용된, 그리고 앞으로도 이용될 가능성이 농후한 세력의 부상이 두렵다.


  “... 이 책은 이 시기를 (대략 오바마가 당선된 2008년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패배한 2016년 즈음까지) 인터넷문화와 하위문화의 관점에서 다루며, 페미니즘과 섹슈얼리티, 젠더 정체성, 인종주의,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의제가 분출하던 기간 동안 주류 매체들의 레이더망 바깥에서 치열하게 이루어진 온라인 문화전쟁을 추적한다. 이 온라인 문화전쟁은 1960년대나 1990년대의 문화전쟁과는 다르다. 1960년대와 1990년대의 문화전쟁은 젊은 세대가 일으키는 문화적 세속화와 자유화의 물결을 문화적 보수주의로 무장한 기성세대가 가로막으려는 전쟁이었다. 지금의 온라인 백래시에는 십대 게이머, 스와스티카를 게시하는 익명의 일본 애니메이션 ‘덕후’, 아이로니컬한 <사우스 피크South Park> 보수주의자, 반페미니즘 테러리스트, 사이버 추행꾼, 밈을 만드는 트롤troll 등으로 구성된 기이한 전위부대가 동원된다. 이들은 대의명분이 불분명한 블랙 유머와 위반 행위를 수시로 전시하는 탓에 그것이 진정으로 정치적 신념에 근거를 두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그저 웃자고 하는 것인지도 명확히 알기는 어렵다. 모호하게나마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것이다. 그들은 지친 리버럴을 관통하는, 즉 기득권 정치에서 텀블러의 가장 괴팍한 구석과 새로운 정치적 감수성을 전투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캠퍼스 정치까지를 관통하는 지적 순응주의가 간절함과 도덕적 자화자찬으로 표현될 때 이를 신나게 조롱한다.” (pp.9~10)


  이명박근혜의 어두운 시기 동안 우리는 일베의 게시판에 횡행하는 저열한 말과 그 말에 기름을 붓는 정치 세력과 그 세력의 사상적 우군을 자임하는 거간꾼들을 실컷 보았다. 촛불 정국이라는 거국적 봉기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잠시 이들을 잊고 있었다. 꺼진 줄 알았던, 온라인 게시판을 장악하고 있던 혐오의 불씨는 다시금 화르륵 불타 올랐다. 그 불길은 온라인 게시판을 떠나 야권의 대권 주자에게 옮겨 붙었다.


  “... 게이머게이트는 게이머들, 챈문화의 극우주의자들, 반페미니즘과 온라인 극우를 주류 담론장으로 끌어들였고 대체로 남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청년 집단을 정치 세력화하여 문화적 좌파와의 문화전쟁에 맞서는 전술을 조직화하는 구심점이 됐다. 이러한 정치 세력화는 정치적 올바름에 비판적인 사람들로부터 페미니스트 문화 십자군의 과도함을 염려하는 사람들까지를 망라했다...” (pp.52~53)


  《인싸를 죽여라》는 미국판 일베 펨코 문화의 짧은 변천사라고 불러도 무방해 보인다. 우리의 일베나 펨코 게시판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포챈(4chan) 게시판에서 많은 것들이 시작된다. 포챈 게시판은 애초에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토론을 위한 용도로 2003년 만들어졌지만 익명 게시판을 통해 우리의 남초 커뮤니티와 마찬가지로 혐오를 기반으로 하는 논란을 퍼뜨리는 진원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 온라인에서 드러난 새로운 우익의 감수성이 구식 우파와 다를 바 없으며 따라서 새삼스럽게 생각하거나 관심을 줄 필요가 없다고 하는 주장은 틀렸다. 계속해서 바뀌고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우익 감수성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초기 단계에서 반문화와 위반, 저항정신의 미학을 흡수한 능력은 그것이 발산하는 매력의 본질과 그들이 적대하는 제도권 리버럴 세력에 대해서도 드러내는 바가 많다. 새로운 온라인 우파를 이해하려면 정통 우파에서 공통점을 찾기 보다 차라리 1968년 좌파의 슬로건인 ‘금지를 금지하라’와 접점을 찾는 편이 유의미할 것이다. 나는 새로운 우파의 감성을 여타의 우익 운동이나 보수주의 혹은 자유지상주의의 일부로 해석하는 것과 거리를 둔다. 그 대신 페페 밈을 올리는 인터넷 트롤들과 온라인 위반 행위의 스타일이 18세기 사드의 저작에서 19세기 파리의 아방가르드와 초현실주의, 전후 미국의 여성화된 순응주의에 대한 저항과 영화비평가들이 1990년대의 ‘광란의 남성 영화’라고 부른 <아메리칸 사이코>, <파이트 클럽>과 같은 영화들까지를 관통하는 어떤 전통을 따른다고 주장한다.” (pp.62~63)


  챈문화라고(4chan은 2003년 시작) 불리우는 이들의 활동은 디시인사이드(1999년 시작)에서 떨어져나온 일간베스트(줄여서 일베, 2011년 독립), 에펨코리아(줄여서 펨코, 2008년 인터넷 게임인 풋볼 매니저 정보 공유 커뮤니티 사이트로 시작)로 이어지는 우리의 익명 게시판 문화와 판박이다. 여기에 넷우익의 근거지인 일본의 2ch(1999년 시작되었고 현재는 5ch로 명칭이 바뀜)가 있으니 한미일의 온라인 극우 공조라고 불러야 할까.


  “언어 사용에서 사회적 의례 및 정치적 올바름의 억제로부터 자유로워진 이드의 광란으로서, 온라인 세계의 정서는 전반적으로 성경 공부보다는 입에 걸레를 문 듯한 악성 댓글의 정신에 가깝고 전통적 가족의 가치보다 <파이트 클럽>을,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보다 사드 후작의 정신을 따른다. 흔히 경제를 둘러싼 전쟁에서는 우파가 승리했고 문화를 둘러싼 전쟁에서는 좌파가 승리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오늘날 온라인 우파의 부상은 우파 정체성 정치가 승리를 거둔 결과이기도 하고, 1960년대 좌파의 반문화 및 위반의 형식들이 사회적으로 수용된(이것도 승리라면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자유지상주의, 개인주의, 부르주아 보헤미아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아이러니, 그리고 궁극적으로 허무주의까지, 그동안 우파가 좌파에 대해 비판적 낙인을 찍었던 특징들이 이제는 이아노풀로스가 속한 운동의 특징이 되었다. 이아노풀로스와 포챈의 영향을 받은 우익 세력의 부상은 보수주의 부흥의 증거가 아니다. 텀블러 스타일 정체성 정치의 부상이 사회주의 혹은 경제적 좌파의 부흥과 무관한 것처럼 말이다.” (pp.116~117)


  하지만 이러한 온라인 극우 세력의 범람을 그저 한미일의 특성이라고 할 것도 없다. 3월 7일자 경향신문에서는 <‘홈트시대’ 운동 채팅방에서 세력 키우는 영국 극우세력>이라는 기사를 발견할 수 있다. 내용인즉슨, 코로나로 짐에 나가지 못하고 홈트(홈트레이닝)를 하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서로를 독려하기 위해 만든 피트니스 채팅방에 모인 남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국의 극우가 그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로부터 출현한 신우익의 감수성은 담론의 범위를 생각보다 훨씬 더 오른쪽으로 급격히 이동시켰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몇 가지 논리가 있다. 하나는 그러한 감수성이 대학 캠퍼스와 트위터, 그리고 유튜브의 표면 위로 떠오르기 훨씬 이전부터 텀블러 같은 플랫폼이 대표하던 새로운 정체성 정치의 적대적인 온라인문화에 맞서는 식으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체성 정치는 우파 진영의 발언을 제한하고, 인종과 젠더 이슈에 관한 담론의 창을 왼쪽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문화적 좌파의 레토릭은 반남성, 반백인, 반이성애, 반시스젠더로 점철되었다. 텀블러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온라인문화는 비주류 사상을 주류로 끌어올리는 데도 성과를 거뒀다. 챈문화의 충격적인 저속함과는 대조적으로 극도의 민감함을 보이지만 하위문화적이며 급진적이라는 점은 비슷했다.” (pp.137~139)


  미국의 경우 이 인터넷 게시판의 키보드 워리어들은 트럼프의 등장과 집권이라는 역변의 시기를 거치면서 ‘대안 우파’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되었다. 특히나 이들은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라는 개념으로 각종 정체성 문화를 향하여 강한 반감을 드러내면서 뭉쳤다. 우리의 익명 게시판에서 진지한 주장을 향하여 보이는 선비질이라는 조롱과 비아냥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 성 혁명은 한 사람과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결혼관념을 깨뜨리고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결혼과 가족에 대한 절대적인 의무라는 족쇄로부터 엄청난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청년기의 무기한 연장은 무자녀 성인의 증가와 가파른 성적 위계질서 또한 가져왔다. 일부일처의 쇠퇴로 인해 달라진 성생활에서 엘리트 남성은 한층 더 넓은 성적 선택권을 쥐는 반면 그렇지 않은 대다수 남성 인구는 점점 더 독신주의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처럼 낮은 지위에 대한 그들의 불안과 분노는 여성과 인종 문제를 향한 철저한 위계질서의 주장으로 이어졌다. 가차 없는 거절에서 기인한 상처는 앞서 소개한 포럼들에서 곪아 터졌고, 그들은 자신에게 엄청난 치욕을 안겨준 잔인한 위계질서의 주인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pp.188~189)


  이러한 온라인 게시판은 남초 커뮤니티라고 불리우는데 그만큼 남성 유저의 비율이 높고, 그들의 연령 또한 이십대의 젊은층에 밀집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반페미니즘을 기치로 여성을 향한 혐오에 노골적인데, 이번 대선 정국에서 야권의 반여성 전략이 이십대 남성들을 향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만약 이 반여성적 후보가 당선된다면 이러한 전략의 성공이 언론에 의해 대서특필될 것이다.)


  “... (인류학자) 콜먼의 묘사에서는 〔트롤에 대한〕 일말의 감탄과 인정이 엿보이지만, 내 생각에 앞서와 같은 특징은 챈을 둘러싼 문화가 얼마나 사악하고 비안간적인 심연으로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를 암시하는 동시에 이미 언제나 그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러한 인터넷 세계가 대항문화의 스타일과 감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성이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터넷 세계가 대항문화의 스타일과 감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인간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가 결국 대안우파와 완전히 결합했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pp.200~201)


  어느 페친의 게시물에서 자신이 늙어 죽을 때까지 이준석이라는 정치인을 보게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싫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노골적으로 이십대 남성의 편을 들어주며 남초 커뮤니티의 입을 정치판으로 끌어들인 이 정치인이 아직 너무도 젊기때문에 나온 말이다. 나 또한 그러한 두려움을 떨치기 어렵다. 당장은 패싸움에서 밀려날 터이지만 그는 언제든 그 혐오의 입을 빌려 재등장하는 길을 이번에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 1960년대 서구 대중문화를 지배해왔던 미학적 가치들, 즉 위반, 전복, 반문화 같은 것들이 오늘날 온라인 극우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온라인 극우는 종래의 극우적 편견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니체적 반도덕주의로 무장한 채 어떤 기독교적 윤리의 제약도 거부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극우와는 확실히 다르다. 온라인 극우는 주류적이고 순응적이고 상식적인 그 모든 것에 대한 의로운 경멸로 가득 차 있다...” (pp.222~223)


  글을 쓰는 동안 자정을 넘겨 선거 운동은 끝이 났을 것이고, 선거일이 도래했다. 나의 두려움이 현실이 될 것인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승패가 어떻게 나든 이준석이 대변하였던 우려스러운 온라인 혐오 정치는 어떻게든 계속될 것이다. 온라인 생태는 우리가 처음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막을 힘은 없다. 저자의 마지막 문장이 아래와 같은 이유다.


  “최근 몇 년 동안의 온라인 문화전쟁은 우리의 상상 범위 이상으로 끔찍해졌고, 그것이 도래케 한 아비규환의 상태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진보주의자들은 ‘분노’가 ‘네트워크가 되어’ 그것이 실생활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며 기뻐했지만, 그들이 예견한 리더 없는 디지털 혁명으로서의 유토피아적 인터넷 중심 시대는 삽시간에 우리로부터 멀리 달아나버렸다. 갈수록 더 곪아가는 비인간적이고 반동적인 온라인 정치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이제 주류에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는 온라인 세계가 이것을 더 부추구지 않고 억제할 있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pp.230~231)



앤젤라 네이글 Angela Nagle / 김내훈 역 / 인싸를 죽여라 (Kill All Normies) / 오월의봄 / 250쪽 / 2022 (2017)



  ps. 책에는 주석이 있어야 해석이 가능한 여러 단어가 등장한다. 그 중 몇 가지는 아래와 같다.


  트롤 troll 트롤은 본래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생물로, 동굴이나 언덕 밑에 집을 짓고 살며 인간에게 장난과 행패를 일삼는 존재로 묘사된다. 악의적으로 논의에 훼방을 놓거나 타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이를 가리켜, 트롤, 그러한 행위를 트롤링이라고 일컫는다.


  인싸 normies 직역하면 ‘평범한 사람’인 normie는 포챈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극우-남성 커뮤니티에서 경멸적 의미의 은어로 사용된다. 사회 규범적으로 요구되는 것들, 가령 직장에 다니거나 연애를 하고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 등을 ‘평범하게’ 수행할 수 있으며 전반적으로 주류의 감성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멸시와 증오를 담고 있는 말이다. 이러한 용례는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인싸’가 별칭으로 쓰일 때의 용례와 매우 비슷하므로 이처럼 옮겼다...


  SJW Social Justice Warriors ‘사회정의의 투사들’로 직역되며, 정치적 올바름에 민감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부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미디어 콘텐츠나 타인의 발언 등에 가차 없이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을 조롱과 경멸의 의미를 담아 지칭하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비슷한 의미로 ‘프로불편러’라는 말이 쓰인다.

매거진의 이전글 크리스티앙 보뱅 《환희의 인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