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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3시간전

크리스티앙 보뱅 《환희의 인간》

가능의 시간을 뒤돌아보면서 불가능의 시간을 향하여...

  ‘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p.9)


  글이 시작되는 첫 번째 페이지에 위와 같은 문장이 팽팽하게 적혀져 있다. 문장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가 떠오른다. 영화에서 오필리아는 판이 준 마법의 분필로 문을 그리고, 그 문을 열고 괴물이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 두 번째 임무를 완수한다. 그리고 관람객 혹은 독자인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경계의 결계를 무너뜨리는 장면을 획득한다. 


  ‘나는 숨구멍도 아직 닫히지 않은 어린 죄수의 삭발한 머리처럼 작고 단단한 책을 꿈꾼다’ (p.45)


  크리스티앙 보뱅의 《환희의 인간》이라는 이름의 에세이집에 실린 문장들은 단단하기도 하다. 쉽사리 부서질 것 같지 않으며 붙잡고 늘어지기에는 틈이 보이지 않는다. 빼야 할 것들을 대부분 빼고 남은 것들, 어지간해서는 더이상 걸러낼 것이 없는 심상의 마지막 가루들로 마감된 석재 같다. 슬그머니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면 까칠하였던 기억의 흔적이 옅게 짐작될 뿐이다.


  “단 한 편의 시라도 주머니에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걸어서 건널 수 있다. 읽고, 쓰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는 삼위일체다. 시는 불타는 돌들에 둘러싸인 침묵이며 세상은 별들에까지 이르는 차가움이다. 새벽 두 시, 여왕들은 죽고 나는 그들의 외침에 경탄한다. ‘항상 사랑하고, 항상 고통받으며, 항상 죽어가기를.’ 세상은 이 외침에 깃든 영감을 알지 못한다. 삶의 등불을 켜주는 이는 죽은 자들이다.” (p.84)


  불순한 것들의 침입을 허락하는 시간은 어디일까. 낮일까 밤일까 아니면 새벽일까. 반대로 불순한 것들의 틈입을 절대 허락하지 않는 시간은 어디일까, 존재하기는 할까, 그러한 공간, 마법의 분필로 그림을 그리고 들어가면 발견할 수 있는 널찍한 식탁 같은, 기괴한 공간 내지는 그러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상상의 공정, 그 사고의 심연이 철커덕 철커덕 자물쇠를 잠근 채로 가라앉는 시간 같은...


  “나는 알코올 중독자가 마신 술병보다 더 많은 수의 책을 읽었다. 책과 멀어진 삶이란 단 하루도 생각할 수가 없다. 책이 가진 느림에는 병을 고치는 사람의 방식이 녹아있다. 나는 눈부신 고요함이 있는 하얀 백악질의 절벽에 조각된, 책이라는 시원한 예배당에서 수많은 여름을 보냈다...” (p.113)


  아직은 핼쑥한 봄이다. 봄이 되면 거대한 표지판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을 생각이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으로 조각되거나 뻣뻣하고 단단한 채로 책을 읽을 작정이다.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시간들을 줄이고 싶지 않다. 긴 하품 끝에 고개를 들면 세상은 여전할 것이고, 나 또한 고스란히 유지될 것인데, 바뀐 것은 그저 비둘기의 뒤를 따르는 그림자의 각도뿐이라면 좋겠다.


  “암컷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물어 안식처에 데려다 놓듯이 삶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 나비의 부서지기 쉬운 날개부터 죽은 이들의 근심스러운 얼굴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탐구해야 할 동일한 비밀이 담겨 있다. 새끼 고양이의 감춰진 두 눈이 이름 없는 계시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이 계시의 이름을 찾기 바라는 기대로 가장 순수한 시가 쓰이고,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이름의 표면을 만지기 위해 우리는 책 위에 손을 올린다.” (p.168)


  하루가 바뀌는 바로 그 시간 혹은 그 순간에는 나는 혼자이고, 고양이는 나를 들여다본다. 가능한 하루는 끝이 났고 드디어 불가능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고양이는 그럴 때 얼굴의 방향과 가슴의 향방을 일치시키지 않는데, 그 교집합 없음이 고양이의 유연함의 원천이려니 한다. 그러니까 글쓰기란 가능의 시간을 뒤돌아보면서 불가능의 시간을 향하여 몸을 움직이는 유연함이 아닐까...



크리스티앙 보뱅 Christian Bobin / 이주현 역 / 환희의 인간 (L’HOMME-JOIE) / 1984BOOKS / 195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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