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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9시간전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 드레스》

통제할 수 있는 시간 한 움큼을 통제되지 않는 시간 위에 슬쩍...

  “... 객관적인 눈으로 차분히 행하는 독서가 완벽한 독서는 아니다. 그런 독서가 핵심에 이르는 독서는 아니다. 그런 독서는 책의 깊은 광맥을 건드리지 못한다. 책에 담겨 있고 당신의 눈과 삶의 저변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반짝이는 진실의 핵을 건드리지 못한다. 당신의 눈 속, 삶의 저변, 즉 근원에 가 닿는 또 다른 독서만이 당신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당신 안에 자리한 책의 뿌리로 직접 가닿는 독서, 하나의 문장이 살 속 깊은 곳을 공략하는 독서.” (p.48) 


  난감하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나는 무엇이 무엇인지 밝히기 어렵다. 나는 눈시울에 손을 얹은 채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이 무엇인지 밝힐 수 없거나 밝히기 싫다. 그래도 나는 천천히 굴러간다. 무엇도 그것을 막을 순 없다. 나는 무엇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고개를 틀어 외면하여도 무엇은 언제나 불쑥 내 앞을 막아선다.


  “그녀는 장님처럼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봄을 향해 가듯 글쓰기 속으로 들어간다. 당신에게 간혹 노트를 보여주기도 한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치 펜싱 칼처럼 당신의 마음을 건드린다. 뾰족한 칼끝이 당신의 시선 속으로 놀랄 만큼 깊숙이 파고든다. 당신을 감동시키는 그건 수수께끼이다. 거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곳에 존재한다. 어느 날 그녀는 글을 쓰지만, 다른 날은 더는 쓰지 않는다. 이 두 번째 날이 몇 년이고 지속된다. 마지막으로 태어난 아이가 이 시기를 차지한다. 그녀는 잉크병에 든 우유를 쏟고 백지로 아이의 몸을 감싼다. 그녀는 일체의 문장을 아이에게 양보한다...” (p.84)


  햇살, 향수 냄새, 그림자, 후미진 정원, 구부러진 안경, 그을린 웃음, 이별의 인사 그러므로 빈도가 높은 작별... 무심코 울어대는 전화벨 소리는 내 그럴 줄 알았어, 사라진 조사, 길을 잃은 목적어를 닮았다. 나는 언제나 나를 떠나기 위해 이삿짐을 나를 준비가 되어 있고, 당신이 거기서 보자고, 라고 나에게 말했을 때, 나는 거기가 어디인지를 물어야 했다. 모든 허물은 내게 있고, 나는 허물을 벗을 준비가 되어 있다. 허물은 나의 버려질 집이다.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 너무 가난해 아무도 원치 않는 삶, 신 혹은 사물들을 피난처로 삼는 삶이다. 그곳에는 무(無)가 차고 넘친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수많은 문들로 이루어진, 자체의 풍문들로 길을 잃은 삶과는 반대되는 삶이다. 그런 삶들을 가지고는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다. 그런 삶에서는 말할 거리가 하나도 없으니까. 우리는 오로지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 구걸하는 이 여인의 순결한 얼굴을 보려면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밖에 없다. 저녁 시간 차곡차곡 쌓이는 그 글들을 바라볼밖에. 어린아이의 잠 속에서 불어나는 엄청난 유산이다.” (p.91) 


  대략 하나의 삶이 지나간 후에 네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무엇의 주문을 끝내고 얌전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너의 소리에 집중하느라 그만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암전, 호흡 그리고 포옹, 네가 잠자코 나를 받아들이는 동안 내가 주문한 무엇이 등장하였고, 나는 화들짝 놀라며 포옹을 풀어버렸으며, 제풀에 놀란 세상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또 하나의 삶이 스쳐 지나갔다.


  “유년기를 벗어난 우리는 몇 발 떼다 곧 멈춰 선다. 모래 위로 나온 물고기 같다. 성년이 된 우리는 죽음 속을 제자리걸음 하는 사람 같다. 우린 기다린다. 기다림이 스스로 굴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잠을 자거나 죽는 것이 매한가지일 때까지, 우린 기다린다. 사랑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사막을 배경으로. 처음엔 보이지 않고 그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다.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나아가는 모습이 보일 뿐이다. 사랑은 자신을 향해, 스스로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pp.119~120) 


  그리고 덩달아 나를 떠난 무엇이 있다. 찻잔을 들여다보니 하나의 삶이 소용돌이치며 회전하는 중이다. 웅크린 어깨가 함께 소용돌이 치는 중이다. 소묭돌이와 날개짓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소용돌이를 놓치지 않겠다. 그것은 내게는 일종의 불문율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날개짓과 소용돌이는 한 번도 같은 자리에 서있지 않았다. 많은 공통점들을 나열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죽음 속으로 난 길은 갑자기 좁아져 지나가려면 모든 걸 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은 우리의 소유물을 사방에 흩뿌리며 우리가 이 종말에 대비하게끔 한다. 마당을 적시고 지나가는 한 차례 빛줄기 같다. 우리안엔 더없이 생생한 고독이 남는다. 조용한 자각이다. 유년기가 저무는 여름 끝 무렵의, 부드러운 한 줄기 빛이다.” (pp.123~124)


  바야흐로 여름의 출발선에 섰다. 이제 곧 갑작스런 손찌검처럼 더울 것이다. 우리 둘은 아니 우리 모두는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간 위를 흐르는 중이다. 그렇게 위안한다. 당신의 삶은 위로받을 자격이 있나? 그렇다면 죽음은? 나는 후자를 향해 몰두하기로 하고, 내가 아직 지불하지 않은, 가냘프게 남아 있는 시간을 사용하기로 한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시간 한 움큼을 누군가의 통제되지 않는 시간 위에 슬쩍 포갰다.



크리스티앙 보뱅 Christian Bobin / 이창실 역 / 작은 파티 드레스 (Une Petite Robe de Fête) / 1984BOOKS / 133쪽 / 2021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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