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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눈보다 마음이 호사스러운 여행...

by 우주에부는바람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위트가 풍부한 알랭 드 보통의 소설들에 푸욱 빠져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가 섹스에 대하여 보여주는 연애에 대하여 보여주는 화려한 수사의 철학은 그 미려함만으로도 환희였으니... 그런 그가 쓴 여행에 관한 책이라는 설명에 곧바로 손이 간다.


“인생에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몇 초보다 더 큰 해방감을 주는 시간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가 차의 도움을 받아도 느리게 움직일 수밖에 없는 곳, 종아리 근육과 엔진들이 산꼭대기에 이르려고 애를 쓰는 곳, 500미터 정도 앞에는 언제나 나무나 건물이 늘어서서 우리 시야를 제약하는 곳. 그때 갑자기 엔진의 억제된 진동과 더불어 우리는 완만하게 대기 속으로 솟아오르며, 눈이 아무런 방해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거대한 시야가 열린다... 이런 이륙에는 심리적인 쾌감도 있다. 비행기의 빠른 상승은 변화의 전형적인 상징이다. 우리는 비행기의 힘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 자신의 삶에서 이와 유사한 결정적인 변화를 상상하며, 우리 역시 언젠가는 지금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많은 억압들 위로 솟구칠 수 있다고 상상한다.”


사실 제대로 된 여행을 떠나본 것이 언제였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명절날 지방에 계신 부모님을 뵈러 간다거나 회사의 워크샵을 제외한다면 서울을 벗어나는 일조차 쉽지 않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여행에 대한 책자에 눈이 가고 시야가 확 트이는 풍광이 가득한 사진첩에 눈이 간다. 직접적으로 맞닥뜨리지 못하는 그러한 것들이 무슨 소용인가 싶으면서도 또 그렇게라도 간접 체험조차 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 험난한 도시 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 있으랴, 싶다.


“시인은 도시가 생명을 파괴하는 여러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비난했다. 사회 위계에서 우리의 지위에 대한 불안,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질투, 낯선 사람들의 눈앞에서 빛을 발하고 싶은 욕망. 워즈워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먹고살기가 편해도 자신에게 진정으로 부족하지도 않고 또 자신의 행복을 좌우하지도 않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런 혼잡하고 불안한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진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어려워보였다. 고립된 농가에 사는 것이 오히려 유리했다...”


(풍성하지 않은)항상 보는 풍경과 (주위를 둘러볼 여유조차 없는)항상 걷는 길, (상대에 대한 이해보다는 이해받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항상 대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얄팍한 주기의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는 일상은 결국 문명인이라 자부하는 도시인들을 진정한 아름다움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다. 인공화 된, 그리고 억지 학습된 아름다움에 쇠뇌당하고 기술과 예술의 모호한 경계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내면으로부터 전도된 가치를 상대방에게 유출하고, 또 이를 변호하기 위해 견고하고 새롭되 검증되지 않은 아름다움의 논리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러스킨은 아름다움과 그 소유에 대한 관심을 통해 다섯 가지 중심적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아름다움은 심리적인 동시에 시각적으로 정신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복잡한 요인들의 결과물이다. 둘째,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에 반응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타고난 경향이 있다. 셋째, 이런 소유에 대한 욕망에는 저급한 표현들이 많다(앞서 보았듯이, 기념품이나 양탄자를 산다거나, 자기 이름을 기둥에 새긴다거나, 사진을 찍는 등의 행위를 포함하여). 넷째,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요인들(심리적이고 시각적인)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그런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계없이, 그것에 대하여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여행을 중심 테마로 놓고는 있지만 책은 여행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예술과 철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니 생애 처음 해외 여행을 떠나는 직장 동료에게 내용을 읽어보지도 않고 책을 빌려 주었다, 너무 어려웠어요, 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기대에 대하여, 여행을 위한 장소들에 대하여, 이국적인 것에 대하여, 호기심에 대하여,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숭고함에 대하여, 눈을 열어주는 미술에 대하여,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습관에 대하여라는 소제목들만 본다면 여행과 연관이 있을 듯 싶다. 그렇지만 각각의 챕터들에서 작가가 인용하고 해석하고 응용하는 작가들은 J. K. 위스망스, 샤를 보들레르, 에드어드 호퍼, 귀사트브 플로베르, 알렉산더 폰 훔볼트, 윌리엄 워즈워스, 에드먼드 버크, 욥, 빈센트 반 고호, 존 러스킨,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 등으로 익숙하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기존의 알랭 드 보통이 보여주던 철학적 발랄함을 기대했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다.


알랭 드 보통 / 정영목 / 여행의 기술 (The Art of Travel) / 이레 / 200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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