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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상황'은 끝나지 않았고 '이야기'는 향방을 알 수 없으니...

by 우주에부는바람

지난 해 12월 3일, 비상 계엄이 선포되었던 날에 나는 비비언 고닉의 《상황과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읽는 일에 전념을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던 시기였고, 그래서 나는 그날 저녁을 먹고 난 이후 자리를 뜨지 않고 내내 비비언 고닉의 책을 읽었다. 정확히 얼마간의 시간이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꽤 긴 시간 집중하였다. 책을 모두 읽고 난 다음 폰을 열었고, 그제야 비상 계엄이 선포된 사실을 알았다.


“모든 문학 작품에는 상황과 이야기가 있다. 상황이란 맥락이나 주변 환경, (가끔은) 플롯을 의미하며, 이야기란 작가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는 감정적 경험, 혹은 통찰과 지혜, 혹은 작가가 전하고픈 말이다...” (p.18)


그러니까 비상계엄선포라는 형태를 띤 12·3 내란 사태는 바로 그날 우리들 주변을 채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시간 이후로 새벽까지 나는 텔레비전을 통해 포고령이 발표되고, 국회의사당에 계엄군이 들이닥치고, 시민들이 국회의사당으로 모이고, 경찰이 국회의원의 국회의사당 출입을 막고, 국회의원이 담을 넘어 국회의사당으로 향하고, 계엄군이 본청에 들어가고, 정족수를 넘긴 국회의원들이 계엄해제 요구안을 가결시키는 장면을 확인했다.


“... 회고록이나 에세이에서 진실을 말하는 서술자―작가가 한 조각의 경험을 구조화하기 위해 자신의 불안하고 지루한 자아에서 뽑아내는 서술자―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많다고 느꼈다. 그런 서술자가 강하고 명료하게 드러나는 작품들에 나는 여지없이 끌린다.” (p.33)


계엄이 해제되고 다음 날 나는 정상적으로 출근을 하였다. 대부분이 그렇게 했다. 계엄이라는 상황은 끝이 났고 모두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대통령의 행동에 의아하였던 최초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가슴을 쓸어내렸고 드물게 보았던 프로그램들을 유튜브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몇 권의 소설을 읽었고 리뷰를 남겼다. 하지만 그러다가 문득 암전...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모든 일을 떠맡는다. 누군가는 작가의 의향을, 누군가는 반대편의 생각을 전한다. 즉 누군가는 자아의 생각을, 누군가는 대치하는 타자의 생각을 대변한다. 그들 모두에게 발언권을 줌으로써 작가는 역동성을 얻는다. 논픽션 작가는 협업할 사람이 오로지 자기밖에 없다. 그러므로 작가가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역동성을 얻기 위해 찾고 구해야 할 것은 자기 안의 타자이다. 결국, 서술자가 고백이 아닌 이런 종류의 자기 연구, 즉 움직임과 목적과 극적 긴장을 안겨줄 자기 연구에 몰두할 때 비로소 작품이 구축된다. 여기서 필요한 요소는 적나라한 자기 폭로이다. 자신이 상황에 일조한 부분―즉 자신의 두려움이나 비겁함이나 자기기만―을 이해해야 역동성이 만들어진다.” (p.44)


이번 사태 전에 책을 읽고 리뷰를 적는 일을 한 달여의 시간 동안 멈춘 적이 딱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였을 때고, 두 번째는 박근혜 탄핵의 시기였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의 시기에는 책을 읽는 일조차 힘들었고, 박근혜 때에는 책은 읽었지만 그것을 정리하는 일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내란 사태 이후, 정확하게는 내란 이후에 오히려 목소리를 키우는 국민의 힘을 비롯한 극우 세력의 준동을 확인한 이후 읽기와 쓰기의 정체기를 겪고 있다.


“... 회고록은 증언도 우화도 분석적 기록도 아니다. 회고록이란, 삶이라는 원료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낸 경험을 구체화하고, 사건을 변형하고, 지혜를 전달하는 자아라는 개념에 의해 통제되는 일관된 서사적 산문이다. 회고록 속의 진실은 실제 사건의 나열로 얻어지지 않는다. 작가다 당면한 경험을 마주하려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을 독자가 믿게 될 때 진실이 얻어진다. 작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 일을 큰 틀에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글을 짓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p.107)


대통령의 친위 구데타가 벌여 놓은 그 난장판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욱 힘겨운 것은 우리 사회의 한 축에 저렇게 당당한 극우 세력이 존재함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는 일이 되어 보다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일환이라면 좋겠다. 그들의 발악이 새로운 파시즘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서곡이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상황’은 끝나지 않았고, ‘이야기’는 어느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


비비언 고닉 Vivian Gornick / 상황과 이야기: 에세이와 회고록, 자전적 글쓰기에 관하여 (The Situation and the story) / 마농지 / 197쪽 / 202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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