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더 늙어볼 일이다...
고등학교 때이던가 『백년 동안의 고독』을 너무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보르헤스니 환상적 리얼리즘이니, 남미의 붐문학이니, 그 무엇도 모를 때였지만(노벨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이유로 보았을테지) 기존의 범생이 타입 고전문학에만 열심이었던 나에게는 꽤 충격이었고 또 재미있었던 작품으로 기억된다.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랄지, 회벽에 바를 흙을 먹는 거라든지, 몇몇 상황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도통 마르케스의 작품을 손에 들지 않았다. 몇몇 작품은 집에 있기도 하지만(아내의 책이다) 말이다.
사실 보르헤스를 비롯해서 바르가스 요사, 카를로스 푸엔떼스 등 남미 문학들을 읽었지만 정을 붙이지 못했다. 대략 생각해보면 이쪽 환상적 리얼리즘 문학을 근간으로 하는 그들 중에서 기를 쓰고 좋아했던 작가는 이탈로 칼비노(비록 이탈리아에서 활동했지만 쿠바 태생이고, 그가 보여주는 환상적 리얼리즘은 보르헤스나 마르케스와 한 통속으로 일컬어진다)뿐이다.
“나는 어떤 여자와 잠을 자든 돈을 주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랑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 않은 몇몇 여자들에게는 논리적으로 설득하거나, 아니면 나중에 쓰레기통에 버려도 좋으니 억지로라도 돈을 받으라고 했다. 나는 이십 대부터 상대의 나이와 이름, 장소, 그리고 사랑을 나누게 된 상황과 사랑의 스타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오십 줄에 들어설 때까지 내가 적어도 한 번 이상 잠을 잔 여자는 총 514명이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이제 90살 생일을 맞은 언론인... 아직도 젊은 시절부터 근무했던 신문사에 칼럼을 써내고 있다. 열두살 때 호텔의 여왕이라 불리며 화류계를 주름 자았던 카스토리나에게 동정을 읽은 것을 시작으로, 젊은 시절 딱 한 번 히메나 오르티스란 여자와 결혼을 할 뻔했지만 결국 결혼식장에 가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철칙을 지켰고, 자신의 집안일을 돌봐주던 가정부이자 때때로 섹스 파트너이기도 했던 (이제는 늙어버린) 다미아나의 도움을 받으며 현재까지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았던 주인공... 그런 그가 한동안 잊은 채 살았던 자신의 사랑 방식, 여자를 돈으로 사는 자신만의 방식에 따라 여자를 사기로 작정한다. 그것도 아직 남자 경험이 없는 어린 여자를 말이다.
“...이제 그녀는 고독 때문에 몸집이 줄어들었고, 피부는 쭈글쭈글했으며, 수많은 재주를 갖고 있던 목소리를 들척지근해져서 마치 겉늙은 여자애의 목소리 같았다...”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단골집이기도 했던 로사 카바르카스를 찾은 주인공에게 드디어 14살의 소녀 델가디나(주인공이 그렇게 부르는)가 나타나고, 그는 이제 섹스가 끼어들지 않지만, 사랑의 일종임에는 틀림없는 그 무엇에 사로잡힌다.
“... 정말 멋져요. 나는 항상 질투가 진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해 왔지요... 나는 겨느의 말을 믿기 위해 초자연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성보다는 사랑의 힘이 더욱 강했다... 당신들이 하는 소리가 항상 그렇지! 빌어먹을 창녀들! 더 이상 당신, 아니 이 세상의 그 어떤 창녀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아! 그 계집애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소녀 델가디나에게 행패를 부리고, 로사 카바르카스에게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설명 듣는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그러한 설명을 믿을 수 없다. 그에게 실제로 일어난 사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 속에서(90살 생일이 지났건만, 쯧...) 이미 움을 틔운 의혹뿐이었다.
“... 육십 대는 이제 더 이상 실수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장 열심히 산 시기였다. 칠십 대는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기간일 수 있다는 생각에 끔찍했다. 그러나 아흔 번째 생일에 델가디나의 행복한 침대 속에서 살이 있는 몸으로 눈을 뜨자, 인생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어지러운 강물처럼 흘러가 버리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석쇠에서 몸을 뒤집어 앞으로 또 90년 동안 나머지 한쪽을 익힐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흡족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아흔 살에 찾아온 사랑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속되게 보면 망령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지만, 평생을 창녀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사랑을(혹은 섹스를) 찾았던 주인공이 드디어 아흔 살 생일에 찾은 첫사랑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간간히 노대가의 세상을 읽는 큰 품을 들여다보는 것 정도를 제외하고는 큰 재미를 느끼기에는 역부족... 더 늙어볼 일이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송병선 역 /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Memria de mis putas tristes) / 민음사 / 170쪽 / 2005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