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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이경혜

일을 줄이고 시간을 늘이기로 작정하였다, 일기 때문에...

by 우주에부는바람

요즘 꿈자리가 사납다. 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꿈이 있었다는 기억은 남는다. 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꿈을 꾸는 동안 좋지 않은 기분이었다는 기억은 남는다. 주말에는 마라톤에 출전한 꿈을 꾸었다. 다만 내 주변에 다른 주자들이 없었고 그저 길을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마라톤 대회에 나갔지만 낙오하는 꿈을 꾼 것이다. 게다가 나는 그 와중에도 멈추지 못하고 피니시를 향하여 뛰는 중이있다, 기약없이...




“인류를 일기 쓰는 인류와 일기를 쓰지 않는 인류로 나눈다면 나는 단연코 일기 쓰는 인류에 들어갈 것이다. 혼자 몰래 쓰는 비밀 일기를 열세 살 때부터 지금까지 써 왔기 때문이다. 2022년 12월이면 자그마치 50년에 이른다. 일기장 권수만도 150권을 넘었다.” (p.8)


고등학교 때 나는 꿈 일기를 쓴 적이 있다. 당시에 나는 사나운 꿈자리를 즐겼다. 꿈자리가 사나우면 어쨌든 꿈 일기를 채울만한 이미지를 건질 수 있었다. 《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는 초등학교 때 시작된 일기 쓰기를 오십여 년 동안 유지하는 작가의 일기에 대한 글 모음집이다. 고등학교 때의 꿈 일기 이전에 몇 권의 일기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일기장은 지금 내 수중에 있지 않다.


“해마다 12월 14일이면 나는 〈속삭임〉을 쓰기 시작한 기념일을 축하했다. 생일과 달리 내 의지로 시작한 날이니 어떤 면에서는 더 기념할 만한 날이기도 했다. 나는 원래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축하하고 기념하기를 즐기는 사람이라 이렇게 대단한 일을 놓칠 리가 없었다. 어릴 때는 축하 카드를 써서 일기장에 붙이고, 그때까지 쓴 일기를 쭉 읽곤 했다. 일기장이 몇 권 안 되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p.43)


꿈 일기 다음에는 일종의 일기 메모 노트를 가지고 있었다. 학업과 관련이 없는 스케줄을 작성하는 수첩에 가까웠다. 대학 입학한 이후에는 일종의 술 일기를 쓴 적도 있다. 그날 마신 술의 주종과 양 그리고 함께 한 사람들을 적어 놓고는 했다. 일기라고 해야 할지 메모 노트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 기록들을 한동안 애지중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기록들을 한꺼번에 떠나보냈다, 하염없이..


“... 40대의 어느 날인가, 내가 얼마나 끝없는 가호 속에 살았는지를 강렬하게 깨닫는 순간이 었었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비슷한 기분을 문득 느끼게 되어 일기장 첫 장에 ‘나를 둘러싼 이 아늑하고도 무한한 힘······’이라는 말을 적었고, 그 뒤로는 일기장이 바뀔 때마다 나는 그 순간의 감동을 다시 음미해 본다...” (p.68)


이십대 중반 이후부터 리뷰와 일기가 결합된 쓰기를 시작했다. 플로피 디스크를 비롯한 저장 장치를 이용하다가 몇 차례 데이터를 날린 다음부터는 싸이월드를 비롯한 개인화 영역에 쓴 것들을 업데이트하였다. 1990년대의 리뷰 혹은 일기는 출력하여 파일 노트에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꽂아 놓았다. 하지만 어느 시점 이후부터는 그만두었다. 서재 방의 구석에는 십여 권의 파일 노트가 여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는 모르는 사람이 내 일기만 읽는다면 오히려 나에 대해 왜곡된 생각을 가질 수 있겠다는 두려움. 앞에서 썼던 ‘부분의 진실은 오히려 거짓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과 통하는 얘기다. 그러니 왜곡의 천재인 기억에 맞서서 일기를 쓰지만 일기야말로 실체를 왜곡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진실’의 얼굴을 하고 있기에 그것은 더욱 위험한 왜곡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 쓰고, 기억을 못 믿어 일기를 쓴다. 일기로 인해 나의 본질이 더욱 왜곡될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p.127)


지금은 아래아 한글로 리뷰 같은 일기 혹은 일기 같은 리뷰를 작성하고, 블로그와 페이스북 그리고 브런치스토리와 스레드에 올린다. 한때는 일주일에 세 권 정도 책을 읽었고, 한 편 정도의 영화를 보았다. 그때는 일주일에 서너 편 이상의 글을 작성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일주일에 하나가 고작이다. 올해부터 일을 줄이고 시간을 늘이기로 작정하였는데, 이것도 이유들 중 하나이다. 일기에 대한 책을 읽었더니 일기를 열심히 쓰고 싶어졌다.



이경혜 / 어느 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 보리 / 187쪽 /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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